독일 본의 베토벤 생가에 지어진 ‘베토벤 하우스 뮤지엄’에는 다양한 종류의 보청기가 전시돼있다. 오늘날과 같은 귓속에 끼우는 작은 보청기가 아니라, 큼직한 나팔처럼 생긴 금속제의 울림통 같은 보청기다. 그중 하나가 지금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BP홀에 전시돼있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시작된 ‘베토벤 온 투어’(BTHVN on Tour) 순회전에서는 보청기뿐 아니라 베토벤이 그의 이니셜을 새겨둔 바이올린, 악보, 필담수첩, 흉상, 앤디 워홀의 판화 등을 볼 수 있다. ‘베토벤 하우스 뮤지엄’이 제공하는 이 순회전은 첫 기착지인 LA에서 5월26일까지 무료 전시된 후 뉴욕, 신시내티, 보스톤을 거쳐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돌게 된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20대 중반부터 귓속에 이명이 심해지는 청력이상에 시달리다가 44세 무렵에 완전히 청력을 상실했다. 31세때 자살을 생각하면서 동생에게 쓴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보면 이로 인한 처절한 괴로움과 함께 그러나 예술을 위해 다시 살기로 다짐하는 ‘악성’(음악의 성인)의 초인적 의지가 상세히 드러나 있다. 편지가 상당히 긴데, 주요부분만 짜깁기하면 이렇다.
“아, 내가 증오에 차있고 고집불통이며 사람들을 혐오한다고 생각하는 너희들은 얼마나 부당한가! 6년째 몹쓸 병에 걸린데다 무능한 의사들이 병을 더 악화시켰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아라. 뜨겁고 활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태어나서 사교계 생활의 유희를 좋아하던 내가 일찍이 고립되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외롭게 살아야만 했다… 아! 어느 누구보다도 완벽한 상태여야만 할 감각, 과거에 내가 소유했던 극소수 음악가들만이 가졌던 완벽한 감각의 약화를 어떻게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나를 붙드는 것은 예술, 바로 그것뿐이었다. 내 속에서 움트는 모든 것을 내놓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불가능해보였다… 자, 됐다. 기꺼이 나는 죽음 앞으로 나아간다.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않겠는가?”
56년의 생애 동안 베토벤은 작품번호(Opus) 있는 것만 138곡, 작품번호 없는(WoO) 기악곡과 성악곡 200여곡, 그 외에 다른 작품번호(Anh, H, B)가 붙은 300여곡을 작곡했다. 이 가운데 청력을 완전히 잃은 후에 나온 것이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교향곡 9번 ‘합창’과 장엄미사곡, 최후의 걸작들로 평가되는 후기 현악사중주 6개, 그리고 ‘피아노의 신약성서’라 불리는 32개 피아노소나타(‘피아노의 구약성서’는 바흐의 48개 평균율클라비어)다. 한 음도 실제로 들어보지 못하고 순전히 머릿속에서 그려본 음의 조화와 배열을 악보로 옮긴 불후의 명작들이다.
베토벤이 청력을 상실한 이유로는 매독, 납중독, 발진티푸스, 파제트병, 또는 깨어있기 위해 자주 머리를 찬물에 담그곤 했던 습관 등이 모두 거론되지만 확실한 건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생애 마지막 10여년동안 그가 사람들과의 필담을 위해 썼던 수백권의 수첩이 남아서 베토벤의 음악과 예술, 삶에 대한 생각과 통찰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크나큰 역설이라 하겠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벌써 2년전부터 세계 음악단체들은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마련해왔다. 오케스트라마다 특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베토벤에 정통하다는 지휘자나 연주자들은 전곡 연주와 음반 녹음에 도전하고 있으며, 베토벤의 도시인 독일의 본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2020년 내내 베토벤 음악축제가 계속될 예정이다.
LA 필하모닉도 예외가 아니다. 2015년 베토벤 9개 교향곡 전곡 연주에 도전했던 구스타보 두다멜 음악감독은 이번 시즌 베토벤의 5개 피아노협주곡 전곡 연주를 17일부터 24일까지 진행하고 있다. 피아니스트 랑랑이 5곡 모두 협연할 예정이었으나 왼손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아 2번만 연주하고 나머지 4곡은 신예 피아니스트 4명이 하나씩 맡았다. 또 오는 10월에 9번 교향곡을, 12월에는 3번 교향곡 ‘영웅’을 연주한다.
오렌지카운티의 퍼시픽 심포니 역시 2019-20 시즌에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전곡 연주(피아니스트 알렉산더 로마노프스키 협연)가 있다. 아울러 2개 서곡 및 로망스 1번과 2번(데니스 김 협연), 바이올린 협주곡(클라라 주미 강 협연), 교향곡 7번과 8번도 들려준다.
실내악 앙상블 ‘카메라타 퍼시피카’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두 시즌에 걸쳐 ‘왜 베토벤인가’(Why Beethoven)란 주제로 매달 베토벤의 실내악을 탐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또 LA 체임버 오케스트라, 왈리스 아넨버그 센터, 브로드 스테이지, 밸리의 소라야 퍼포밍 아츠 센터 등 다음 시즌에 베토벤 특별 프로그램이 없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디즈니홀에 전시된 보청기를 들여다보면서 베토벤을 생각한다. 자신에겐 들리지 않는 자신의 음악이 인류애와 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가 ‘음악의 성인’이라는 최고의 타이틀을 차지한 것은 너무나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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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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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하고자 해야만 하는 열정 희생정신 남을위한 모두를 위한 희생정신, 요즘 지구촌에서 특히 미국에서 벌어지고있는 나 나 나 나...나만이 오로지 나만이 있을 뿐 인 마음 들, 남은 이웃은 그저 나의 보조 나를위해 태어난 자들 나를위해 이용하면 그만이라 생각하는것 같은 트럼프 그리고 그 당원 지지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