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가슴 벅찬 감동이, 때론 말 못할 슬픔과 절망, 고단함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특히 낯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 한인들에게는 결이 다른 스토리들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내장돼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속, 이제는 잔잔한 강물처럼 침잠됐을 워싱턴 지역 한인들의 초기 이민생활의 애환과 남다른 사연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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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한다. 1976년 11월 13일 이민 길에 올라 김포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공항 터미널에서 흘러나오던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잊지 말고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라는 노래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렇게 눈물로 어머니 나라를 떠나와 푸른 꿈을 안고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이 땅에서도 천직인 약사로서의 사명을 다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약사고시 준비를 할 수 있게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은 1974년에 설립된 워싱턴지구한인약사회의 선배 약사들이 외국 약대 졸업자들의 권익을 되찾기 위해 이민 약사들에 대한 불공평한 대우에 맞서 맨 몸으로 부딪쳐 끝내 면허 취득의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볼티모어 소재 Medstar Habor Hospital(전 South Baltimore General Hospital)에서 인턴과정을 마치고 1980년 뉴욕주 약사면허, 1984년에는 메릴랜드 약사면허를 취득해 Medstar Habor Hospital에 채용되어 2016년 4월 은퇴할 때까지 근무했다.
나의 약사 인생 32년을 돌아보면 가장 아름다운 추억들은 폭설경고에서 비롯되었다. 2010년 폭설이 내린 겨울 새벽에 일어나보니 눈이 10여인치 쌓여 있었다. 나는 즉시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 연락해 출근을 해야하는데 도로 사정상 운전이 불가능하니 인력이 필요하면 차를 보내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한 시간쯤 후 연락이 와서 받아보니 자기는 이웃에 사는 스티브라고 하며 지금 자기 집 앞에서 바퀴가 눈 속에 빠져 고생하고 있다고 기다려 달라는 전언이었다. 진창에서 힘들게 빠져나온 자원봉사자 운전사 아저씨는 그날 수술실 간호사 1명과 레지턴트 의사 한 분의 출근을 도와야한다며 리스트를 주었다.
정오가 가까운 시간에 도착해 병원 약국에서 옷을 갈아입고 카페테리아에 들르니 마침 자원봉사자 아저씨가 커피 값을 지불하려고 라인에 서 계셔서 새벽부터 반나절을 고생하신 그 분에게 점심 함께 드시고 가시라고 그렇게 청을 드려도 한사코 사양하시고 돌아가시는 뒷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그날의 그 뭉클한 감동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 창밖에 눈만 내리면 살아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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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자 / 매리옷츠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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