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걸려오는 전화는 섬찟하다. 그날도 새벽이었다. 전화기를 들자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툭 떨어졌다. “먹기만 하면 설사해. 벌써 몇 달째.” “신영아 무서워 나…”
엄마는 췌장암 말기였다. 간으로 전이도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온몸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엄마, 알았어요, 내가 곧 갈게요” 했다.
한국에 나가 있던 두 달, 나와 주위 사람들은 엄마가 나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식사도 잘하시고, 안색도 좋고, 기분이 좋으셨다. 집에는 교회에서 오신 분들로 매일 가득찼고, 거의 24시간을 교대로 엄마를 지켜주셨다. 쉬지 않고 찬송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그리고 신기했다. 어떻게 사람들은 자기의 시간을 내서 쉬지 않고 엄마를 찾아주고 음식을 만들어 오고 같이 있어 줄 수 있을까?
당시 내게는 없는 것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 시간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하게 하는 거지? 미국으로 돌아와서 내가 교회를 찾은 것은 바로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다.
내가 미국으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엄마는 돌아가셨다. 그때 엄마 나이 54세였다. 31세부터 혼자서 딸 셋을 지켜내신 엄마. 31세부터 집 나간 남편을 기다린 아내. 세상에서 보면 꽤 높은 벼슬을 하던 집 막내딸로 태어난 엄마는 태어나자 마자 유모 손에 길러졌다. 남아선호 사상이 강한 외할머니는 아들에겐 쩔쩔매고 딸을 무시하는 것을 손녀딸인 내 앞에서도 가끔 들키셨다. 더구나 혼자 사는 딸이 부끄러웠는지, “너는 가만있어” 하며 엄마를 나서지 못하게 하셨다.
외할머니는 엄마 장례식에도 나오지 못하고 몸져누우셨다. 그런 외할머니는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는 집안에서 평생 혼자 안동교회를 다니셨다. 외할머니는 당신 돌아가시기 전에 막내딸과 막내아들을 가슴에 묻으셨다. 자식들을 가슴에 묻고 그 긴 세월 새벽에 혼자서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하셨을까 생각해본다. 엄마 돌아가시고 내가 힘 추스려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분의 기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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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영 (가정사역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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