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토맥 포럼 최학주 박사 특강… “노론 배타성·왕조 무능에 개화 늦어”

최학주 박사가 개화기 선각자인 자신의 조부 최남선의 ‘신문관’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포토맥 포럼(회장 이영묵)이 육당 최남선의 장손인 최학주 박사(80) 초청 특강을 열었다.
애난데일에 있는 설악가든에서 14일 낮 열린 특강에서 최 박사는 ‘선각자들을 통해 본 개화기 모습’을 주제로 최남선, 안창호, 조만식, 김성수, 이광수, 주시경 등 근대 선각자들의 개화 계몽 목표는 “조선의 정체성 확립, 신문명 지식 전파, 근대 시민의식 형성, 공화정치 입국 지향이었다”고 전제했다.
특히 1923년의 형평운동은 백정과 광대, 노비, 기생, 승려, 무당 등 천민들의 신분제 계급을 타파하는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최 박사는 한중일 3국의 개화기, 조선의 개화가 늦어진 이유, 근대 선각자들의 개화 작업, 근대 자강자치론자들의 활동 등에 대해 파워 포인트 슬라이드를 곁들여 설명했다.
최 박사는 조선의 개화가 늦어진 이유로 정치이념의 고착화(노론 성리학 예론의 배타성, 외척과 족벌주의), 왕조의 무능(건국이념 상실, 사농공상의 수직적 질서 구조), 노비제도의 비생산성(노동의 대가 부재, 서구의 조선 시장 무관심) 등을 들었다.
최 박사는 “조선은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개화에 눈뜨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1907년 최남선이 신문관을 창립해 ‘소년’을 창간하며 근대화에 대한 민중들의 합의를 도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지만 이후 개화파 선각자들의 이상 추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덧붙였다.
근대 선각자들의 개화 작업으로는 조선의 정체성 정립(문화 역사 보존 작업, 조선학 연구 등), 신문명 지식전파(어문 표현과 소통의 근대화), 근대 시민의식 형성(신민회와 청년학우회 설립), 공화정치 입국 지향(언론 조성, 신간회 자치 운동 및 브나로드 문맹퇴치 운동), 국가 경영능력 배양 등을 들었다
이날 최 박사는 최남선이 만든 ‘신문관’을 중심으로 ‘소년’ 잡지 발행, 어문 정립, 시문독본(육당 자경), 독립 선언서와 안창호가 창립해 근대시민의식을 태동시킨 ‘신민회’, ‘흥사단’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삼일운동 후 개화기 선각자들은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한 민족주의계와 조선공산당을 만든 사회주의계로 갈라지며 이 때부터 좌우의 대립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육당 최남선은 사학자·문인으로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7인 중 한 명이었으나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친일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뉴저지에 거주 중인 최 박사는 1964년 서울대 공대 화공학과 졸업 후 67년 도미, 제약 회사에서 신약 특허와 관련된 업무를 하다 은퇴했다.
최 박사는 흑백으로 된 1884년 현 서울의 풍경과 수표교 빨래터, 당시의 지도, 1900년 제물포 전경과 강화도조약 체결, 백성들의 생활상 사진을 보여주며 참석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특강에는 권태면 총영사와 정종욱 전 주중대사, 강창욱 박사, 안홍균·변만식 씨, 홍용식 박사 부부 등 약 50명이 참석, 높은 관심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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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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