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 주인공은 남쪽의 자본주의 광장과 북쪽의 전체주의 광장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는 어디서도 진정한 자유와 소통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 서울과 로스앤젤레스(LA)를 오가며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과 마주하고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광장을 갖고 있는가?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 서면 어딘가 불편한 정적이 감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묵묵히 광장을 내려다보지만, 정작 시민들의 숨결은 그 공간에 스며들지 않는다. 벤치는 있지만 앉는 이 없고, 분수는 흐르되 그 물소리는 메아리치지 않는다. 집회의 구호로 가득한 주말이 지나면, 사람들은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기고 빠르게 떠난다. 그것은 600년의 조선을 기념하는 공간일지언정,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비어 있는 풍경’에 불과하다.
반면 LA의 그랜드 파크는 야외 공연, 요가 수업, 음식 축제가 끊이지 않는 장소다. 하지만 그 분주함 속에도 무언가가 빠져 있다. 자발적인 머무름, 우연한 대화, 나른한 오후의 침묵 같은 것들. 행사가 없는 날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펜스가 쳐있다.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는 이 공간은 열린 듯하지만, 도시의 리듬과는 어긋나 있다. 우리는 그 광장을 나의 일상에 맞추어 즐길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만남의 광장’이 사라진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다. 광장이 없기에, 사람들은 각자의 내면에서 마음속 광장을 찾고 있다. 그것은 교회일 수도, 카페일 수도, 골프장이나 꿈속의 도시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탈리아 시에나의 ‘캄포 광장’은 특별한 차원의 시간을 품는다. 거대한 조개껍질 형상의 경사진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붉은 벽돌의 중세시대의 건물들, 할머니는 비둘기에게 빵을 던지고, 연인들은 햇살 아래 비스듬히 한가하게 누워 맥주를 나눈다. 무대도, 기념물도 없는 이곳은 비어 있음 덕분에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곳에서 우연히 한국인 유학생은 광장에 들어서자 마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왜 우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광장의 형태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답했다. 나 역시 그 순간 오래 전 떠난 옛 애인이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광장은 오래된 건축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였고, 신을 숭배하는 성소 같았다. 설계된 공간이 아니라, 삶이 흐르는 자리였다.
속도와 효율이 강요되는 서울과 LA는 지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당신은 이 도시에서 누구입니까?” 광장은 소비하는 장소가 아니라, 나를 머물게 하고, 우연히 친구를 만나고, 아무 말 없이도 함께 앉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우리는 숲속에서 나와 광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소외와 무관심에 잠식된 도시에서, 진정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이고 정체성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찾아가야 한다.
광장은 비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를 채운다.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보다, 누가 그 안에 머물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리하여 광장은 우리 시대에 잃어버린 ‘만남의 장소’, 사라진 공동체 감각, 그리고 회복되어야 할 감정의 중심을 환기시켜야 한다.
비어 있기에 열려 있고, 침묵하기에 말을 건네는 그 공간. 우리는 지금 그런 ‘광장’을 다시 꿈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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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성 도시계획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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