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자기만의 무기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 ‘필살기’까지는 못 되더라도 이 풍진 세상 살아내는 데 든든한 자원이나 방어막으로 쓰일 재능 같은 것. 그게 뭔지 정확하게 알기만 해도 사는 일은 한결 수월해진다.
구사하는 단어가 스무 개 남짓한 15개월짜리 조카손녀는 입꼬리를 샐쭉 올리며 짓는 웃음이 압권이다. 그 웃음을 동반한 단어 한두 개로 아이는 제가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얻어낸다. 곁에서 지켜보는 어른들이 만 시름 잊고 웃게 만드는 효험까지 지녔으니, 아이는 토르의 스톰브레이커보다 멋진 무기를 지닌 셈이다.
한데 야외 헬스장(일명 산스장) 저쪽에 앉아 아내에게 훈수를 두는 남자는 재수 없는 지적질이 무기였던가 보다. “에이~, 그게 아니라고.” “나 원 참. 그거 하나도 못 들어 올려?” 입을 열 때마다 부정적인 감탄사를 곁들이는 그 말투가 10m쯤 떨어진 곳에서 어깨 근육운동을 하던 내 신경 줄을 팽팽하게 조였다.
슬쩍 그쪽을 보았다. 한눈에도 여성은 아팠다. 레그 익스텐션 위에 앉아서 어떻게든 한 번 더 바를 들어 올리려 애쓰는 야윈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파리한 얼굴은 이미 땀범벅인데, 불콰한 눈으로 앉은 그 옆 남자는 자기 속이 더 탄다는 듯 손에 쥐고 있던 생수를 들이켜고는 다시 코치 모드로 돌입했다. “발목이 아니라 허벅지에 힘을 주라고. 그래야 근육이 생긴다고 몇 번을 말해도 그러네, 에이 참.” 아픈 아내 손을 잡고 여기까지 애써 올라왔는지 모른다. 걱정과 애정이 저렇듯 끊임없는 지적질 폭격으로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듣는 사람을 바짝 얼어붙게 하는 저 말투가 영 글러 먹었단 말이지.
간절하게 원하는 무언가는 애당초 내 것이 아니다. 고급 피트니스 회원권을 살 만한 경제력도, 세상 많고 많은 빌런들을 시원하게 때려눕힐 원투 펀치도 내 몫은 아니지만 그런 나에게도 한 가지 ‘비기’는 있었다. 움푹 들어간 눈이다. “어디서 눈을 그렇게 떠?” 어릴 적 어른에게 혼나다가 이건 좀 아니다 싶은 생각이 찾아올라치면 상대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고집이 세다는 둥, 어른을 우습게 안다는 둥 혼잣말 같은 비난을 웅얼거렸지만, 흠칫 놀란 상대의 표정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말법 집을 크게 건드리는 꼴이 되겠구나.’
운동을 멈추고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연거푸 잔소리를 쏟아내던 남자가 내 눈과 마주치자 사레들린 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아내를 일으켜 세워 산 아래 등산로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아우, 저 눈깔.”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만 보던 친구의 한마디였다. “그래. 이 모든 게 아무 때나 내 부아를 돋워서 하찮은 무기일지언정 녹슬지 않도록 도와준 네 공이다.” 그렇게 대꾸하는데 걱정 하나가 스멀스멀 찾아왔다. 내일 또 저 부부를 만나면 어떡하지? 그냥 모른 척해야 하나, 아니면 순한 얼굴로 가볍게 인사라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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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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