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으로서 나찌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일기장에 이를 메모해둔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이 글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슬프고도 감동적인 기사와 뒷 이야기를 접했기에 이를 공유하고 싶어졌다.
2년전 봄인가 싶다. 한국의 모든 신문들이 한 변호사의 별세 소식을 보도한 적이 있었다. 요약하면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후 판사가 된 그는 네 딸을 두고 있었는데, 첫째가 눈에 이상이 왔고 백방으로 치료했지만 결국 양쪽 시력을 모두 잃었다.
그는 딸 치료 등 뒷바라지를 위해 천직으로 여기던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 딸은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공부를 잘해 미국으로 유학가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돌아와 서울맹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취직한지 9개월 되는 때쯤 두 동생들과 함께 집 부근 삼풍백화점에 들렀었고, 그 때 붕괴 사고로 세 자매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변호사는 딸들의 보상금으로 받은 6억 5천만원에 본인 재산 7억원을 보태어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첫째가 근무했던 서울맹학교에 기증하였다. 그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정광진(86)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세 딸을 한꺼번에 잃은 아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미쳐버리지 않고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상상하기조차 힘든다. 아마도 짐승처럼 울부짖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 겁니까?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격렬하게 대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격렬한 항의 중에 절망을 뚫고 나오는 희망의 빛이 사방을 휘감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그는 놀랍게도 절대적 절망을 절대적 희망으로 전환시켰다. 그가 만든 맹인들을 위한 장학재단은 세 딸의 이름 한자씩을 가져와 “삼윤장학재단”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맹인 학생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그의 장례식날 참석했던 제자 변호사의 말을 빌리면 언론의 대서특필과는 달리 문상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했다. 상주는 건장하고 용모가 준수하고 정중한 20대 청년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그 청년은 사고 때 세상을 떠난 둘째 따님의 아들이었다.
그 따님은 당시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았었고 한 살짜리 아들이 있었는데 정 변호사님이 그 외손자를 데려와 자신이 키우며, 사위를 설득해 재혼케하여 새출발하게 하였다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선택이 아날 수 없다.
그 아이는 절망속의 조부모에게는 살아야 될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홀아버지보다 더 극진한 사랑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 아이 생부에게는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 새출발하는데 부담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택인가?
그의 시련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몇년 후 넷째마저 병으로 떠났다. 어떻게 다 키운 자식 넷 전부를 잃고도 그런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중 나는 문득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떠올랐던 것이다.
정광진 변호사님은 빅터 프랭클이 주장한 삶의 태도를 취했던 것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저 떠난 딸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하는 것, 그 남겨진 혈육이 온전히 성장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남은 가족들이 다시 평화를 얻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해냈다.
빅터 프랭클은 그 책에서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에 선택과 힘이 들어 있다.”고 첨언했다. 시련이 왔을 경우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힘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난다.
시련 속에서 억울해 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대신, 삶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냈던 사람은 불멸의 가치를 만들어 냈다. 참으로 본받아야할 존경스런 삶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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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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