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일러 로빈슨이 찰리 커크를 총격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이후 필자는 줄곧 로빈슨의 부모에 관해 생각했다. 그들이 느꼈을 고통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의 부모는 아들이 저지른 범행의 사후방조자가 되는 대신 경찰에 자수하도록 설득했다.
옳은 일이었지만 사실 아무나 할 수 없는 부자연스런 결정이었다. 이런 경우 본능은 빗나간 친족을 숨기고, 부족을 돌보며 사회가 스스로를 지켜나가도록 내버려둔다. 반면 문명은 이러한 저급한 본능을 극복하고 ‘우리’와 ‘그들’이라는 원초적인 논리가 아닌 보편적인 원칙을 고수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 중 실제로 이처럼 큰 도전에 직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 잠시 멈춰 그들의 희생을 되돌아보자. 또한 이보다 훨씬 더 쉬운 언론의 자유라는 원칙을 우리가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보자.
과거 10년 동안 필자는 ‘취소 문화’와 언론 자유에 대한 정부의 공격과 관련해 보수주의자들이 숱하게 불만을 제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난주, 필자는 보수의자들이 그같은 일을 더 큰 규모로 실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소셜미디아 폭도들은 사회 저변층의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일터에서 ?아냈고 정부는 기업들에게 언론검열을 압박했다.
진보적인 온라인 무리들이 정당한 이유없이 근로자들을 해고시켰을진 몰라도 최소한 그로 인해 미합중국 부통령의 환호를 받은 적은 없었다. 바이든 행정부가 ‘가짜 정보’를 적극적으로 단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규제보복 조치를 앞세워 소셜미디어사들을 위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바이든 행정부 관리들은 브렌던 카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처럼 팟캐스트에 출연해 지미 키멜의 토크쇼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ABC 계열사들의 면허를 취소하겠다는 식의 으름장을 놓지는 않았다.
무기등급에 해당하는 이같은 고도의 위선은 보수주의자들 가운데 소수의 소행이었지만 온라인상에서 훨씬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를 두고 누군가 위선이라고 지적하면 “지금 진보주의자들이 살인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에 이건 예외”라고 반박하거나 진보적 소셜미디아를 가리키며 “위선을 보고 싶다면 저쪽을 바라보라”고 받아쳤다.
좌파는 뒤늦게 언론자유의 중요성을 발견한 듯 호들갑을 떨지만 그들의 태도가 진지하지 않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필자는 소셜미디아을 뒤져 저명한 취소 전문가와 공범들이 얼굴을 바꿔 1차 수정헌법 조항에 경의를 표시하는 모습을 잦아보다가 마시던 음료수에서 입을 떼었다. 갑자기 터져나온 신랄한 웃음보에 행여 사래라도 걸릴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언론 자유는 결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식의 오래된 명분은 반대편에서 입에 올릴 때에는 그리 설득력있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제아무리 진보주의자들이 어리석어 보인다 해도 적어도 그들은 지금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언론의 자유처럼 부자연스러운 원칙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충실성은 오늘날의 문명을 떠받치는 토대이다. 소수의 수렵채집 집단에게나 유용할 법한 부족에 대한 충성심과 개인적 판단으로는 현대 산업사회를 운영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선 - 심지어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동일하게 집행되는 광범위하고 공정한 원칙이 필요하다.
우리의 공유된 원칙들이 순조롭게 작동할 때, 우리는 그 상호 합의가 얼마나 섬세하고 필수적인지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깊이 뿌리박힌 본능이 다시금 고개를 들어 사회 계약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우리는 공평을 중시한다고 공언하지만, 가장 소중한 신념을 어긴 혐오스러운 외부인들을 처벌하는 데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반대로, 우리가 열등 집단의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것을 그들이 어겼을 때조차도, 우리의 존경하는 동맹들을 제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상황은 예외라고 주장하며 합리화한다.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소셜 미디어에서의 자신들의 지배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규칙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사회 정의를 특별한 경우로 보았다. 자유로운 언론은 압제자의 도구였기에 그들은 자연스레 상대편을 탄압하면서 자신들에게는 면책권을 부여했다. 이제 그들은 그 결과를 목도하기 시작했다.
언론의 자유에 대한 확고하고 공정한 기준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내 말은 그게 아니었어!’라고 항의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어수단을 찾지 못한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민주당이 FCC를 통해 규제력을 행사하게 되면 보수주의자들 역시 보호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파괴될 때까지 서로를 계속 공격할 수도 있고, 한때 우리가 공유했던 깨지기 쉬운 평화를 되살릴 수도 있다.
필자가 말하는 ‘우리’는 모호하고 집단적인 ‘우리’를 뜻하는게 아니라 당신과 나를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끔찍한 행동에 대해 그저 고함을 지를수만은 없다. 그건 대단히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비효과적이다. 객관적으로 상대방의 행동이 더 나쁘다해도 당신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은 당신 쪽이니 그곳에 화력을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일방적 무장해제처럼 보인다 해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의 보복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쓰디쓴 당파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본능을 넘어서라는 요구가 혹여 비현실적인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특히 상대방의 대다수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을 때에는 더욱 더 이같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하지만 원칙을 준수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가장 힘든 상황에서 로빈슨 가족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일한 상황에서 다른 가족들 역시 올바르게 행동할 것이라는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묵묵히 원칙을 고수했다.
커크의 미망인 역시 옳은 일을 했다. 그녀의 남편은 정치적인 이유로 암살당했고 자녀들은 아빠를 잃었다. 에리카 커크는 필자가 이름을 댈 수 있는 미국의 몇몇 대통령과 달리 정적을 비난하고 싶은 자연스런 충동에 굴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감동적인 추도사를 통해 남편 살해범을 원칙적으로 용서했고 커크가 지키려던 다른 많은 원칙들, 그중에서도 특히 1차 수정헌법 조항에 대한 신념을 계속 준수할 것임을 재확인했다. 이는 놀라우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합리적인 듯 보인다. 왜냐하면 에리카는 그녀가 택한 것 이외의 다른 길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대화를 멈추면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소통할 능력과 의지를 잃을 때 폭력이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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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건 매카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 CNN ‘GPS’ 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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