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가을을 두루미(鶴, Crane)가 되어 맞아 들였다. 언제부터인가 유유히 창공을 날아가는 두루미가 되어보는 것이 내 영혼에 숨어있던 소망이었던 것 같다.
운중무학(雲中舞鶴), 두루미가 흰 구름 사이를 나는 화폭이 언제나 나를 매료시켜 놓고 있다. 황혼이 짙어 질 무렵, 드넓은 개펄 한 가운데 긴 다리를 묻고 묵묵히 사색에 잠기는 그 우아한 자태는 영감을 계시 받은 화백이 아니고서야 그려낼 수 없는 모델이 아니던가.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낙조가 막을 내릴 무렵 침착하게 하늘로 날아올라 세상의 하루를 관조하는 두루미의 일기장에 어이 경외감을 억누를 수 있겠는가.
제비처럼 바쁘게 날개 휘젓고 생존수단으로 열정을 소모하는 그런 체질이나, 참새처럼 늘 초조하고 두려움에 떨며 조바심하는 그런 패턴을 공감, 공유한 적이 없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스타일로 이 세상을 살아오고 있든 나의 본질은 두루미였고 마침내 어느 틈인가 내가 소망했던 두루미와 함께 찬란한 가을 한가운데 서 있다.
장자는 어느 날 낮잠에서 호랑나비(胡蝶夢, 호접몽)가 되어 이리저리 꽃밭을 날아다니다 꿈에서 깨어났다. 꿈속의 호랑나비가 장자 자신이었던가, 아니면 현실로 돌아온 본인이 맞는 것인지 생의 허무를 깨우치고 삶의 의미를 규명해낸 것 같다. 나의 두루미 소망을 장자의 심오한 도성(道性)이나 철학을 흉내 내려 한다는 황당한 비유는 하지 말라. 나는 단순히 속세에서의 천박한 ‘티’를 벗어버리고 모처럼 격조 높은 두루미가 되어 환상의 가을을 지내고 싶은 염원을 갈구하는 것이다.
20세기 초반부터 지식인 사회에선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The Meta Morphosis>을 화두로 삼는 것이 대유행이었지만 이 역시 내가 추구하는 정서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카프카는 속절없이 기계화 되어가는 물질문명 가운데서 인간의 정체성이 소멸 돼가는 풍조에 ‘벌레’로 가장하여 사회모순을 질타한 것에 초점을 맞췄다.
나의 두루미 변신은 오히려 은인자중(隱忍自重), 묵언수행(黙言修行)을 추구하던 우리 선조 지식인들의 고결함을 찾아가 보려는 것이나 아닌지 나 스스로가 궁금해진다. 나의 두루미 꿈은 순수하고 낭만적이고 어찌 보면 드넓은 벌판 개펄 위에 단출하게 서 있는 두루미의 외로움이 탄로 나는 시간이랄 수도 있겠다.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두루미 꿈을 지향하면서도 정작 두루미답게 살아본 것은 꿈 많던 소년시절 잠시 뿐이었던 것 같다. 너절하고 지저분한 속세의 모순, 부조리에 거침없이 저항하는 야생마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 가을, 계절 탓인가, 본능이 요구하는 건가, 유난히도 쉼표가 자주 밀려온다. 나의 내면세계에 숨어있던 두루미의 꿈이 고조곤히 다가와 자리 잡고 있다. 짙푸른 창공을 여유롭게 날개 젓고 있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45억 년 전 이 지구가 탄생하기 이전에 나는 존재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던 아메바 또는 단세포 그 이전에 무엇이었던가. 어떤 우여곡절을 겪고 무슨 이유로 영혼이라는 숙제를 안고 여기까지 와서 오늘의 이 가을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인가. 격조 높고 순수의 표상 두루미의 꿈이 내 출발의 원초였단 말인가. 올 가을은 내 영혼의 본령을 찾은 시간인 것 같아 감격이 더 해진다.
물론 속세의 불합리들에 야생마처럼 반기를 들어온 습성에서 전혀 새로운 세계로의 해탈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높이높이 멀리멀리 하늘에 떠올라 인간의 비극, 전쟁과 평화, 압박과 수난, 부귀와 배고픔 따위의 모순들을 두루미의 눈으로 공평하게 조감하는 사명도 잊지 않겠다.
문득 코스모스가 들국화와 어우러져 계절을 축복하는 셰넌도어 산야가 그리워진다. 그리고 흘러가기만 하는 세월이 기쁨과 슬픔을 한꺼번에 끌고 와 사뭇 알 수 없는 감정 속에 복받쳐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게 만든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어김없이 봄날이 올 때/그대 여기 오리니/그대 여기 올 때/나는 고요히 이 자리 고요히/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리(그리그의 ‘솔베이지 송’).
확실히 내게 있어서 올가을은 소망이던 두루미의 꿈과 함께 의미심장한 새 역사를 쓰는 시간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두루미가 강원도의 도조(道鳥), 인천광역시, 전라남도 목포시의 시조(市鳥),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군조(郡鳥)이자 서울대학교, 조선대학교의 교조(校鳥)임을 알려드린다.
<
정 두루미 패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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