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천천히 걷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이야기, 올레는 길에 담긴 이야기를 사람과 잇고, 다시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한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해외의 트레킹 길과 달리 ‘길에서 집으로 연결된 좁은 골목길’이란 뜻의 제주 방언 올레에는 마을과 자연, 사람과 이야기가 공존한다. 제주에서 시작한 올레가 일본과 몽골로 수출되며 세계의 주목을 받은 이유다.
제주 올레의 두 번째 일본 자매길인 미야기 올레가 최근 2년 만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앞서 미야기 올레는 2018년 ‘게센누마·가라쿠와’ ‘오쿠마쓰시마’ 2개 코스를 시작으로 이듬해 ‘오사키·나루코 온천’, 2020년 ‘도메’, 2023년 ‘무라타’ 코스를 개장했다. 지금까지 8만여 명이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이달 공개된 여섯 번째 길은 미야기현의 중심인 센다이시의 북동쪽에 인접한 다가조시의 ‘다가조’ 코스다. 당초 15일 개장식과 함께 공개될 예정이었던 ‘자오·도갓타 온천’ 코스는 최근 일본 북동부 지역의 잦은 곰 출몰로 인해 개장을 일주일여 앞두고 내년 봄으로 연기됐다. 이 코스는 9㎞가량의 초급 코스로 최고 높이 1,840m 높이를 자랑하는 자오연봉을 조망하며 걸을 수 있고 완주 후에는 도갓타 온천에서 피로를 풀 수 있어 자연 속에서 온천을 즐기고자 하는 올레꾼의 사랑을 받을 듯하다.
■ 미야기 다가조, 1,000년 전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다가조 코스는 이름처럼 다가성이 중심이 되는 여정이다. 다가조시가 야심 차게 준비한 이 길을 알리기 위해 지난 16일 JR센세키선 다가조역 앞 광장에선 개장식이 열렸다. 미야기현, 다가조시 고위 관계자와 올레꾼 등 1,200여 명이 행사를 지켜봤다.
무라이 요시히로 미야기현지사는 참석자들에게 “미야기현의 매력을 즐기며 계속 미야기로 발길을 옮겨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후카야 고스케 다가조시장은 “1,000년 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도 여러분이 길에서 만나는 새와 식물, 길을 걸으며 맞는 바람과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를 느꼈을 것”이라면서 “사람과 사람의 교류, 자연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1,000년의 시간을 넘어 같은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이 길을, 오감을 활짝 열고 걸어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미야기의 올레길은 의미가 남다르다. 미야기현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 후쿠시마현의 북동부에 접해 있는 미야기에선 전체 사망자의 60%가 나왔을 정도로 인명 피해가 집중됐다. 미야기 올레는 단순히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동일본 대지진의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발걸음인 셈이다.
■ 겉보기엔 수수하지만 고대의 낭만이 숨어 있는 길인구 6만여 명의 작은 도시 다가조는 국내에는 낯선 곳이다. 마쓰시마나 자오산 등 미야기현의 주요 관광지 사이에서도 그다지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다. 올레길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도시. JR센다이역에서 센세키선을 타면 22분 만에 도착하는 다가조역 주변에 대한 첫인상은 수수하다 못해 심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간을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금은 자취만 남긴 했지만 다가성은 고대 일본 동북 지역의 정치·군사·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상징적 장소다. 도시의 이름을 ‘다가성(多賀城)’으로 지은 것도 그 때문이다. 시는 지난해 창건 1,300년을 맞아 성의 남문을 다시 복원하기까지 했다.
코스는 비교적 짧고 난도가 낮은 여정이지만 다가조 코스는 도시의 다채로운 면모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올레길은 도시의 중심에서 시작해 나라·헤이안 시대의 시가 속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장소들로 이어진다.
다가조시는 이 코스의 주제를 ‘시간 여행’으로 잡은 듯했다. 다가조시 기획경영부의 사토 마사시 시민문화창조과장은 “이 길은 고대인들이 걸었다는 역사가 노래와 시로 남겨져 있어서 그 시를 읽고 해당 장소에 서면 1,000년 전으로 타임슬립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일본 전통 시가와 함께 걷는 올레길길이 숨겨 놓은 이야기를 찾는 것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다가조 코스도 마찬가지다. 1,000년 전 다가조시는 지금의 후쿠시마에서 아키타, 아오모리까지 이어지는 무쓰국의 수도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꽤 유명했는지 에도 시대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는 시가의 영향으로 다가조의 곳곳을 방문한 뒤 여행기 ‘오쿠노호소미치’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고대 시가에 나오는 명승지들이 그 시절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겠지만, 시구를 따라 읊으면 당시의 풍경이 얼핏 스치는 듯하다.
노다의 다마가와는 주택가 사이의 구불구불한 좁은 수로가 인상적인 하천으로, 와카의 명소로 유명한 육옥천(六玉川) 중 하나였다고 한다. 개천 위에는 곡선이 예쁜 다리가 놓여 있다. 헤이안 시대 사무라이와 연인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오모와쿠의 다리다. 민가를 빠져나와 덴만구 신사, 다가조 부속 사원 사적을 지나면 동북 역사 박물관에 도달한다.
박물관 옆의 기찻길을 건너면 다가조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옛 성터에 진입한다. 도심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서인지 날씨가 화창한 휴일인데도 나들이 나온 시민은 많지 않았다. 성터 인근에는 가세누마 공원과 커다란 호수의 아름다운 풍광이 조금씩 자태를 드러내며 올레꾼의 발길을 붙들었다. 소도시에서라면 이런 명소도 독차지하며 유유자적 즐길 수 있다.
■ “올레길의 진짜 매력은‘우연한 만남’이죠”일본 3대 사적 중 하나로 꼽히는 다가조 정청터를 지나니 일본 3대 고비(古碑) 중 하나인 다가조비와 만나게 된다. 그 옆으로는 새로 지은 티가 확연한 다가조 남문의 장엄한 위용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남문 옆의 유적 안내시설에선 다가성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1,300년 전 고대 도시 다가조의 모습을 대형 모니터 영상으로 볼 수 있고 남문 복원 기록 영상, 3D 모델로 재현한 고대 건축물, 유물 전시도 볼 수 있다. 다가조 코스가 마무리되는 곳이다.
미야기현의 소도시 다가조는 한국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곳이지만 여기에도 자세히 찾아야 보이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백제가 멸망한 후 고위층과 유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이주했는데 그중 일부는 무쓰국에 정착했다. 다가조 남문은 그렇게 바다를 건너온 백제인과 고대 일본의 합작품이다. 사토 과장은 “당시 일본에는 기와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서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의 기술로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며 “한국분들이 오셔서 백제인의 기술이 1,300년 전 도호쿠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꼭 느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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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조=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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