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사업가였던 헨리 뒤낭은 1859년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에서 점령군 오스트리아와 이에 맞선 프랑스·이탈리아 연합군간의 치열한 전투현장을 목격했다. 교전 수시간만에 4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데 충격 받은 뒤낭은 마을 주민들을 불러모아 국적에 관계없이 부상자들의 피를 닦아주고 돌봐주었다.
3년 뒤 뒤낭이 전쟁의 잔혹함을 생생히 담은 ‘솔페리노의 회고’를 출판했고 이 책이 유럽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각국 정부도 뒤낭의 외침에 호응했다. 이렇게 해서 이듬해인 1963년 스위스에 붉은 색 십자가를 상징으로 하는 적십자가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국제기구로 탄생했다.
교사와 공무원 생활을 하다 적십자의 봉사정신에 매료된 매서추세츠 출신 클라라 바튼 여사가 18년 뒤인 1881년 워싱턴 DC에 미적십자를 창설했다. 미적십자는 인류애와 풍부한 재원을 바탕으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선행을 해왔다.
전장을 누비면서 피 흘리는 부상자를 치료해 주던 적십자가 요즘 집안싸움으로 피를 흘리고 있다. 미적십자는 9·11 뉴욕테러 참사 이후 희생자 유족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모금 캠페인을 전개했고 수주만에 5억달러를 모았으나 이 기금의 용처를 둘러싼 내부 이견으로 총재가 사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버나딘 힐리 총재는 이 기금의 절반 정도를 테러 피해자 지원사업에 할당하고 2억달러는 용처를 정하지 않았으며 8,000만달러는 이미 다른 프로그램에 배정했다가, "전용불가"를 고수한 이사들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테러 피해자를 위한 성금을 온전히 본래의 목적에 사용하지 않고 ‘딴 마음’을 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미적십자가 성금 사용을 둘러싸고 불협화음을 내고 봉사보다는 주도권 다툼양상을 보이자, "적십자는 말썽 피우지 않겠지"하던 한인들도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지난 92년 한인들이 LA폭동 피해자를 돕겠다며 낸 성금을 전액 분배하지 않고 이중 상당액을 피해자와는 무관한 건물을 구입하는 데 써 비난받았던 성금관리위원회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적십자에 테러 성금을 전달한 후원자들은 "다른 단체보다 믿을 만하다고 여겨 작은 정성을 보냈는데 이 곳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실망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느낌이다"고 쓴 소리를 했다. 제 길을 가지 않고 한눈을 판 적십자는 질타 받아 마땅하다는 얘기다.
테러로 인해 사회 곳곳에 불신이 팽배해지고 갖가지 일탈현상이 합리화되고 있는 요즘이다. 우리의 하루하루도 부지불식간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지 않는지 한번쯤 돌아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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