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후의 세계사는 한 지역에 의한 부와 패권의 집중, 그리고 전세계적 세력 균형과 부의 평등한 배분이 대략 500년을 주기로 순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차대전 후 신생독립국의 출현과 함께 세계의 패권 구도는 변하고 있다. 과거 250여년 지속된 서양의 패권은 이미 그 정점을 지난 것처럼 보인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패배, 아프간 전쟁에서의 소련의 패배와 같은 것들은 제국주의 시절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제국주의 시절에는 전세계적 세력 균형이 구미와 일본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2차대전 후에는 신생독립국의 출현, 성장과 함께 제3세계가 전세계적 세력 균형의 주된 참여자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가 21세기에는 더욱 강화되어 대테러전쟁 이후의 세계의 패권 구도에서 제3세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랍세계의 대서방 테러는 구미의 패권과 오만에 도전하는 제3세계의 저항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불행히도 미국이 대 아프간 전쟁에서 조속히 승리를 이끌어낸다는 보장은 없으며, 조속히 승리를 이끌어낸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상당한 양보와 희생을 치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희생의 단적인 면은 테러 이전에 이미 시작된 경기 침체의 조짐과 함께 테러가 불러오는 소비와 생산의 위축의 결과 미국의 경제력이 심각하게 축소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미국의 군사력이 미국의 패권을 보장해 주지도 못한다. 군사대국 소련의 해체의 원인은 다름 아닌 경제 파산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대테러전쟁은 제국주의 시절의 대규모 패권전쟁과 대비되는 소규모 국지전의 한 새로운 유형일 뿐이며 제국주의 종말 이후 평등화와 전세계적 세력 균형의 추세에서 이번 대테러전쟁이 과거 1, 2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전세계가 참여하는 대량파괴 전쟁으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랍과 서양의 권력투쟁에서 양쪽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정치적 불안정이 경제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프간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서양의 영향력은 축소될 것인데 서양이 비운 힘의 공백을 누가 채울 것인가?
2차대전 이후 고도성장의 모멘텀을 지속하고 있고 이 분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동아시아는 서양이 남겨놓은 여백을 상당부분 잠식하여 21세기의 가장 탁월한 세력으로 부상할 것이다. 동아시아는 21세기에 진행될 세계적 평등과 세력균형 이후 보다 먼 장래에 자신에게 집중될 패권에 대비하고 있다.
현재의 패권세력 미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아랍은 기실 차기 패권의 최선의 후보가 되지 못한다. 미국을 대신할 패권국의 후보로 한때 일본을 꼽았으나 일본은 장기간의 불황으로 맥을 못 추고 있다.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패권을 넘겨받는 것은, 비록 그 패권의 기간이 그다지 길지는 않을 것이지만, 저축문화에서 소비문화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세계의 소비시장으로서의 미국의 역할을 일본이 떠맡지 못한다면 일본을 잠시 거칠 수 있는 세계의 경제패권은 중국에 그냥 넘어가게 될 것이다. 중국은 1960, 70년대의 동아 신흥공업국처럼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내고 있으며, 그 인구로 인하여 세계 경제의 패권을 잡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오래지 않을 것이다. 보다 먼 장래에는 통일 한국의 부상도 가시화될 것이다. 공동 통화기금과 자유무역을 핵심으로 하는 한국 주도의 동아시아 지역 공동체 결성 움직임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며, 머지않아 구체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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