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남미계 할머니 환자 한분이 돌아가셨다. 93세로 집에서 주무시다가 자는듯이 가셨으니 소위 말하는 호상이다. 어릴때 남미 콜럼비아에서 이민을 와 대학졸업후 교사로 평생 일하셨고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었으나 정작 본인은 오랜 결혼생활에도 소생은 없었다.
10여년전 이 할머니가 처음 찾아오셨을 때 양로병원에 가기를 원하셨다. 처음 본 할머니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언제 감고 빗었는지 모르게 헝클어져 있었고 오래 빨지 않은 옷에서는 냄새가 나고 의사표현이 분명치 않을 정도로 말을 더듬었다.
대부분 노인들은 양로원이란 말만 꺼내도 화를 내며 마지막 순간까지 거부하는데 이 할머니는 처음부터 가시겠다고 왔으니 궁금하기도 해 병력과 함께 주변사정을 자세히 알아봤다. 남편은 돌아가시고 혼자 사신지가 몇년이 되었는데 힘이 없어 가사를 꾸려가기가 어렵고 정신이 혼미해져 식사나 약을 챙겨 들기도 힘들어 이제는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검진과 기본적인 검사를 한 뒤 며칠 후 다시 오실 때 집에 있는 약들을 모두 갖고 오시라고 했더니 우선 좋은 수면제를 줄 수 없느냐고 하셨다. 남편이 돌아가신 후 혼자 있으면서 불면증이 생겨 수면제를 장복하신다고 한다.
얼마후 할머니가 다시 오셨다. 검사결과는 영양실조 증상과 약간의 탈수현상 이외는 양호한 편이었다. 가지고 온 약병 속에는 수면제가 종류별로 들어있었고 예감대로 할머니는 매일밤 수면제를 여러번 들고 계셨다. 모든 수면제나 신경안정제는 중독성이 강하다.
수면제를 장기 복용하거나 과다 복용을 하게 되면 낮에도 기운이 없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기억력도 감퇴된다. 식욕도 떨어져 식사를 등한시 하게 되고 결국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들어지며 낮에 졸다보면 밤에는 오히려 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나는 할머니 약을 모두 압수(?)했고 일주일 후에 다시 오시되 밤에 잠이 오지 않더라도 뜨게질이나 책을 읽으며 견디라고 말씀드렸다. 그동안 좋은 양로원을 찾아 놓을테니 준비를 해서 오시라고 했다.
일주일후 나타난 할머니는 깜짝 놀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깨끗하고 고상한 옷에 은은하게 향수까지 뿌리고 화장에다 멋있는 모자까지 쓰고 나타난 것이었다. 말씀도 분명하셨고 혈색도 좋아 보였다. 그러면서 이제는 견딜만 하니 양로원에는 않가겠다고 한다.
그로부터 10여년간 단골환자로 한결같이 오셨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수면제를 드시지 않았다. 여전히 밤에 잠을 잘 주무시지는 못했는데 낮에 잠깐씩 눈 붙치는 걸로 견딜만 하시다고 했다. 남편이 돌아가신지 오래 되었으니 이제는 닥터 정 정도면 데이트를 하겠다고 나를 황홀(?)하게 만들던 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품위를 잃지 않으셨다.
환자들을 만나보면 의외로 수면제를 복용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수면제의 중독성과 부작용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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