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폭동 10년 기획특집-타운을 지킨 사람들
▶ 해병전우회, 한인청년단등 자경대 구성 폭도막아내
1992년 4월30일 새벽 2시 피코 스왑밋 폭도 30명 격퇴, 새벽 6시10분 브로드웨이와 47가 한인업소 방화, 오전 9시15분 영사관 경계근무, 오전 11시15분 한인타운 전역 방화·약탈, 오후 2시50분 폭도와 총격전, 조인하 대원 부상, 5월1일 오전 타운 내 경찰과 주 방위군 배치, 5월2일 오전 총영사관서 비상 단체장회의, 10만 평화 대행진….
경찰도 등을 돌린 폭동의 혼란 속에서도 한인타운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사선에 나섰던 자경대원들의 헌신적 봉사정신은 좌절과 실의에 빠진 한인사회에 한 가닥 희망과 위로가 됐다.
당시 자경대의 주축을 이뤘던 단체는 재미해병전우회, 한인청년단, 코리아타운워치팀. 이들을 중심으로 뭉친 대원만 2,000여명으로 추산된다. 해병전우회 총무였던 정인걸(46)씨가 보관해온 상황일지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들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게 한다.
정씨의 일지에 따르면 폭동기간 해병전우회의 총 출동 횟수는 105회. 해병전우회원과 자원봉사 인력은 1,653명이었다. 이들 중 핵심 대원들은 모두 17개 조(5인1조)로 나뉘어 이 중 6개조는 돌격부대, 다른 6개조는 인명구조대, 또 다른 4개조는 상황실 운영 등 역할을 분담했다. 당시 해병전우회가 갖고 있던 무기와 장비는 권총 10정, AK소총 1정, 엽총 4정, 무선통신기 3대, 무선 전화기 2대가 고작이었고 조인하 전 회장을 포함, 대원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자경대원의 일환으로 같이 활동했던 강종민 당시 단장은 "400여명이 청년단에 동참했으나 이 중 20%만 무장을 했고 나머지는 맨 몸으로 폭동의 현장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폭동발발 후 악몽의 이틀 동안 자경대원들은 한인타운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버팀목이었다.
"정말 모를 경찰들이다. 모든 일을 반대로 하고 있다. 강도는 내버려두고 경찰이 할 일을 돕고 있는 우리들은 포박까지 하다니…" 경찰을 믿을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정인걸씨의 일지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피로에 지친 자경대원들에게 큰 힘이 됐던 사람들은 명함이나 내미는 단체장이 아닌, ‘소리 없는’ 다수의 한인들이었다. 장사를 하던 평범한 아줌마들이 평소에는 만지지도 않던 권총과 실탄을 가져오는가 하면 한 할머니는 수십인 분의 주먹밥을 싸들고 찾아와 이들을 감동시켰다. 또 원래 이재성군 추도식으로만 치를 예정이었던 5월2일 아드모어 공원 집회는 ‘이대로 해산해서는 안 된다. 연방청사까지 행진을 해야 한다’는 한 대학생의 울분 섞인 호소에 10만명이 참여하는 평화 대행진의 대 역사로 이어졌다.
<하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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