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인데 아이의 방에 불이 켜져 있다. 방문을 열어보니 아이는 컴퓨터로 숙제를 하고 있나보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손으로는 자판을 두들겨대고 있다. 이어폰으로 듣고 있는 음악소리가 얼마나 소리가 큰지 내게도 들린다. "그러면서 무슨 공부가 되느냐"고 한마디하려다가 "내 친구들도 다들 그렇게 한다"고 답하며 여러번 입 싸움을 해본 터라 볼륨을 줄이라고 한 마디 하고는 방문을 닫고 나온다.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엔 초등학교 6학년 때에야 전깃불이 들어왔다. 그전까지는 마루 기둥에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호롱불 하나와 안방과 사랑채의 기름등잔 하나씩이 조명기구의 전부였던 것 같다. 숙제나 공부는 낮에 했지만 어쩌다 책이 읽고 싶어지면 기름등잔에 바싹 다가앉아야 했다.
책이라야 묵은 동화책 몇 권에 ‘어깨동무’라는 월간지가 전부였고 그것도 외워버릴 만큼 되풀이 읽다 심드렁해지면 삼촌이 보시는 ‘새 농민’이라는 농사잡지까지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도 저도 심드렁해지면 부지런한 어머니가 낮 동안 햇빛에 말려, 들썩일 때마다 포삭한 해 냄새가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손가락으로 동물 모양의 그림자를 만드는 그림자놀이를 하다보면 뒷산의 소쩍새는 귓전으로 바짝 다가와 울었고, 가슴에 덜컥덜컥 얹히던 그 소리는 초저녁이면 삼촌이 불던 하모니카 소리와 함께 내가 느낀 최초의 슬픔 같은 것이었다.
산골마을, 멀리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하루 몇 차례 지나가는 완행버스와 손안의 책만이 밖의 세상으로 향한 유일한 출구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동네는 낮의 고단함으로 잠들어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내 가슴 안으로 바짝바짝 다가와 앉던 소쩍새 울음소리만이 밤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요즈음의 아이들과 다르다면 안방에 잠드신 어른들이 깰까 봐 볼륨을 줄이고 자분자분 들려오는 별밤지기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었다. 소쩍새 소리와 하모니카 소리는 삼중당 문고 속의 시구와 합해져 내 가슴에 구체적인 슬픔의 기색 같은 걸 만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날마다의 하늘에 지금껏 다시 만나본 적 없는 별들이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박하사탕의 향기처럼 떠있었다.
요즈음의 아이들도 사색이란 걸 할까 의문을 가져본다. 리모컨트롤 하나면 화면이 뒤바뀌고 노래 가사가 바뀌고, 컴퓨터 앞에 앉아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이 시대에 기다림이나 사색같은 단어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아버지와 나의 세대가 달랐듯이, 그래서 몰래 몰래 송창식과 함께 ‘고래사냥’이라도 떠나려다 들키면 막내아들 군에 보내놓고 웅얼거리는 소리 같은 걸 음악이라고 듣느냐고 고개를 저으시던 그 아버지 밑에서도 내가 사색하며 자랐듯이 우리 아이들도 그러리라 믿어본다.
아이가 불을 끄고 누운 밤, 하늘엔 그때처럼 별이 반짝이고 있다. 뒷동산에서 멀리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곤 하던 완행버스와 함께 미래로의 알 수 없는 기대를 아린 감자처럼 품어보던 그 날은 다시 돌아올 수 없지만 등잔불 밑에서 꿈꾸던 유년의 밤들은 그 날 밤에 빛나던 별들보다 더 아름답게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잠든 아이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놓으며 이불깃을 올려 준다. 그 옛날 햇빛에 정갈하게 말려 두었던 어머니의 이불이 생각나 돌아서는 나의 등뒤로 그날 밤에 울었던 소쩍새 소리가 들려오고 가슴엔 그리움이 덜컥덜컥 얹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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