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어려운 점이 많다. 공연예술인 만큼 배우와 관객이 함께 호흡하는 이상적인 무대를 만들어야 하는 중압감도 크지만 그보다 먼저 무대 뒤의 현실적 문제들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창작 희곡과 배우, 연극에 목숨 건 연출과 스태프가 있다 해도 경제적 뒷받침이 없다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러한 연극 특유의 메커니즘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관심과 후원 없이는 좋은 무대를 창조하기 어렵다.
미주 연극협회는 4.29폭동 10주년을 맞아 폭동 진단극 ‘블랙 아메리카’(이자경 극본)를 7월5일부터 7일까지 LA 디어터 대극장에서 공연하기로 뜻을 모았다. 4.29폭동을 주제로 한 연극 공연은 창작 희곡의 절대적인 빈곤을 앓고 있는 LA 한인 연극계로선 1998년 12월 쌍둥이 자매를 다룬 실화연극 ‘지나…’ 공연 이후 처음이다.
흔히들 연극은 사회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왜 연극을 하느냐, 왜 연극이 필요하나 등등의 일반적 질문에 대한 간편한 답이 되어준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해서 연극의 사회적 기능이 그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극적인 전개를 통해 재연하는 양식이라면 연극이 없는 사회는 한 마디로 비판기능을 상실한 삭막하고 몰개성적인 사회가 된다는 얘기다.
시쳇말로 돈도 밥도 되어주지 않지만 연극을 하는 이유는 그 안에서 또 다른 ‘나’를 찾는 자기 발견의 가치 때문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연극은 그 자체가 성격과 얼굴(페르소나)을 걸러내고 재창조함으로써 사회와 개인의 삶의 질을 한층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저마다 연극적인 삶을 산다. 그런데 또 연극을 한다. 이는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는 행위와 같다. 그 안에 내가 있다는 걸 확인하기 때문이다. 연극만이 안고 있는 병리 치유기능 때문에 연극이 정신병자와 마약중독자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쓰여진지는 이미 오래다.
어쨌거나 우리 연극계가 아직도 창고극장 하나 마련하지 못한 점은 안타깝다 못해 실로 부끄럽다. 연극인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는 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수준이 너무 낮거나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그래도 80년대 초부터 90년대 초에 이르는 10년 동안 LA는 나름대로 연극문화의 황금기를 만끽했다. 미술 전시회도 거의 주말마다 열려 그야말로 연극과 미술의 허니문 시절을 수놓은 적도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관객과 관람객이 되어주는 동시에 밤이 으슥하도록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고단하고 외로운 이민 초기의 삶을 안주거리로 풀어내던 그 기억들이 그리울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하나 둘씩 소리 없이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연극계의 거의 공동화 현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물론 한국에서 성공한 작품들을 초청해 연극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긴 했지만. 연극 ‘블랙 아메리카’는 우리들이 잃어버렸던 연극 문화를 다시금 부활시키는 계기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4.29폭동은 미주 이민 100년을 사건 사로 통해 볼 때 거대한 분기점이다. 한인 이민 1세대는 4.29를 통해 참담한 좌절 속에 값비싸게 지불하고 ‘코리안 아메리칸’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얻었다.
작가는 작품 속 리커상 주인 한인 김순복씨의 죽음을 통하여 폭동으로 첨예화 됐던 인종간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과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4.29폭동을 새로운 시각으로 진단한 이번 공연이 한인 사회가 연극을 통해 자화상을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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