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목격한 일이다.
강남 무역회관 앞을 지나는데 어디서 이상한 노래가 들려왔다.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노래가사 가운데 ‘미국놈’ 운운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니 권영길 후보지지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젊은 남자 2명과 여자 2명이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춤은 응원단 리더들이 추는 그런 춤이었고 노조파업 현장의 무대에서도 본 춤이었다.
그런데 춤의 배경음악이 가히 쇼킹한 것이었다. 노래 제목이 ‘Fucking USA’로 미국을 저주하고 미군을 한국에서 쫓아내자는 내용이었다. “굴종의 역사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힘있으면 제일이냐 돈 많으면 제일이냐” “쫓아내자 미국놈, 몰아내자 USA, Fucking USA” 대략 이런 가사로 이어져 있다.
춤추는 젊은이들 앞에는 미군 장갑차에 숨진 신효순양과 심미선양의 영정과 그들의 시체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쇼킹한 것은 이 사진의 잔인성이다. 신체의 내장이 다 튀어나오고 머리가 으스러져 눈뜨고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미군의 월남전 미라이 학살사건에서도 이런 사진은 없었다. 언뜻 보면 미군이 한국 여학생을 무참하게 탱크로 깔아 죽인 것 같이 보이는 적개심 솟게 하는 사진이었다. 작전중의 교통사고 사진을 이런 식으로 전시한다는 것은 반미감정을 의도적으로 부추기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촛불시위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는 확인서에 사인을 받고 있었다. “촛불시위는 SOFA 개정을 촉구하는 시위며 결코 반미시위는 아니다”라는 해명과는 거리가 먼 광경이었다.
촛불시위는 누가 뭐래도 반미시위였다. 나는 12월14일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시위를 현장에서 취재했었다. 그때 내가 들은 구호 중 가장 많은 것이 “미군은 물러가라”와 “부시는 사과하라”였다. 그리고 내가 목격한 것은 촛불시위 군중 속에 나부끼는 수많은 깃발들이었으며 그 깃발에는 무슨 무슨 노조라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대통령 후보의 차도 얼씬하지 못하는데 ‘권영길 후보’ 현수막을 두른 대형 트럭이 데모군중 가운데를 뚫고 들어오자 박수가 터지며 열광했다.
촛불시위는 젊은이와 학생들만의 시위는 아니었다. 거기에는 조직적인 노조세력도 적극 참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노무현 지지도 그렇다. 젊은층과 호남지역의 표가 몰린 것으로만 보는데 거기에는 못 가진 사람들, 근로층의 몰표가 포함되어 있다. 선거가 끝난 후 나는 동해안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경상남북도 어촌에 노무현 지지자가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지금 한국의 상황을 바꾸어 놓은 주인공이 젊은층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코끼리다리 만지는 식의 결론이다. 젊은층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주역이 근로층이다. 서울에서 노무현이 51% 지지로 이회창을 누른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이회창이 당선되었느냐, 노무현이 당선되었느냐 보다 미주 교포인 우리에게는 한국의 반미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진전되느냐가 최대 관심사다. 왜냐하면 ‘반미’가 존재하면 ‘반한’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반미’만 입에 올리지만 사태가 악화되면 ‘반한’도 또다른 문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 시민이 된 교포들은 “내가 한국인인가, 미국시민인가”의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한미수교 1백주년을 맞는 2003년이 공교롭게도 ‘한미관계 최대 위기의 해’로 등장하고 있다. 불안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미주 한인사회가 지닌 새해 최대의 관심사는 한국에서 일고 있는 반미운동과 이에 따른 미군 철수 가능성 등 한미관계다. 한미관계가 악화되면 한인사회의 경제사정도 치명타를 입게 된다. 한국의 반미시위는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chul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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