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이전에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은 숫자를 조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경험한 일이 있을 것이다. 수천 명이 모여 민주화 시위를 벌여도 언론이나 정부 발표는 항상 ‘극소수’가 소란을 피운 것으로 되곤 했다.
모인 사람이 얼마냐를 둘러싼 논란은 미국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지난 주말 워싱턴 DC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라크 반전 시위 규모를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시위 주동자들은 50만 명이 넘었다고 주장하고 경찰 당국은 3만으로 추산하고 있다. 숫자를 잘못 적었다 문제가 시끄워질 것 같자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은 아예 몇 명이 모였는지 보도를 생략했다.
반전 시위에 얼마가 왔느냐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숫자를 부풀려 대다수 미 국민이 이에 반대하는 것처럼 포장하려 할 것이고 지지하는 쪽은 애써 이를 축소하려 할 것이다.
문제는 누구도 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DC의 중심인 몰에서 시위가 벌어질 경우 국립 공원국이 공식 집계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발표라는 것이 대충 눈대중으로 때려잡는 식이었다. 이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당국은 헬기로 공중촬영을 하고 동원 버스대 수, 지하철 승객 수까지 따져 정확도를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비판은 그치지 않았다. 시위 주동자들 추산과 당국 발표가 다를 경우 주동자들이 “수치를 조작했다”고 아우성 치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89년도에는 낙태권 옹호론자들이 이곳에서 시위를 벌인 후 경찰 집계가 자기들 추산인 60만 명의 절반 밖에 나오지 않자 부시 행정부가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며 소동을 벌였고 그 다음 해에는 낙태 반대론자들이 숫자를 축소했다고 당국을 공격했다.
95년 흑인 운동가 루이스 파라칸이 100만인 행진을 주도했을 때 당국이 40만으로 추산하자 그는 이를 인종차별주의의 소산이라고 규탄했다. 이처럼 사방에서 샌드위치가 되자 공원국은 보다 정확한 집계를 위해 비행기와 정밀 카메라 등이 필요하다고 의회에 예산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후 공원국은 공식 집계를 포기한 상태다.
지난 10월 같은 장소에서 반전 시위가 벌어졌을 때 뉴욕타임스가 “예상보다 적게 수천 명이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시위대들로부터 곤욕을 치렀다. 그 후로는 아예 몇 명이 왔는지는 기사에 싣지 않고 있다.
반전 집회에 얼마나 많은 시민이 왔는지는 정책에 대한 지지도를 가늠하는 중요 기사다. 정치와 언론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당국이나 언론 모두 시위대의 목소리에 눌려 책무를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이 딱하기만 하다.
<민경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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