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지역에서 기모노로 잘못 알려진 우리 한복을 고유명사화 시키며 파리 패션계에 명성을 드높이던 이영희씨가 이제 세계의 중심지인 뉴욕에 한복 바람을 일으키려 한다.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디자이너 이영희씨가 오는 16일(퀸즈 아스토리아 월드 매너 오후 8시)과 18일(맨하탄 메리옷 마퀴스 호텔 오후 7시) 뉴욕에서 한국문화박물관 설립을 위한 두 차례의 디너 한복 패션쇼를 뉴욕한국일보 특별 후원으로 개최한다. 본보는 살아 숨쉬는 한복의 아름다움을 세계무대에 선보이고, 한국문화 사랑을 위해 평생을 바쳐 온 이영희씨의 삶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두 스승 어머니와 석주선 박사"
이영희씨에게는 두 명의 스승이 있다. 한 분은 돌아가신 어머니. 또 한 분은 단국대학의 석주선 박사다. 어머니는 대갓집 며느리로서 바느질 솜씨가 빼어난 분이었다.
대구 출생인 이영희씨는 집안이 대구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다. 위로 다섯 형제가 죽은 후 태어난 무남독녀였다. 금지옥엽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10살부터 동정을 달게 했고 솜씨가 신통치 않으면 호통을 쳤다. 어머니는 많은 식구들의 옷을 손수 지었고 특히 천을 물들이기를 좋아했다. 아무 것도 아닌 헌 천이 일단 어머니 손에 들어가면 신비한 빛깔로 변하는 마술을 어린 이영희는 숱하게 보면서 자랐다.
석주선 박사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복 집을 낸 후 일부러 찾아간 스승이었다. 그저 남의 맞춤옷이나 지어주는 사람으로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한복에 관한 것이면 닥치는 대로 배웠다.
옷이 생기면 며칠간 잠도 안자고 거기 매달려 바느질법과 색깔, 무늬를 분석했다. 헌옷 하나에서 4∼5개의 영감을 얻는다는 게 그의 공부법이었다. 틈만 나면 박물관을 찾았다. 거기서 우리 전통 색의 조화와 원리를 저절로 깨쳤다.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정식으로 발염기법을 공부도 했다.
"세계인을 사로잡는 그녀의 신비한 빛깔" "
’디자인은 색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발염기술에 그렇게 각별한 공을 들이는 이유가 거기 있다. 선천적인 색감을 타고났지만 그는 복숭아 빛이 고우면 먹던 과일로도 물을 들여볼 만큼 열정적으로 염색법을 탐구했다. 잇꽃 치자는 물론 시금치, 쑥, 밤, 황토, 기왓장 재들이 모두 신비하고 은은한 빛을 낸다는 것을 알았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이 실험 대상이었다.
부잣집 딸로 귀하게 자랐고 명문 경북여중고를 다녔지만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기생 열 아홉 명의 머리를 얹어주었다는 천하의 한량인 아버지가 중2때 세상을 뜨고 뒤이어 사업을 맡은 어머니의 공장이 그만 불에 타버린 것이다. "내년에는 대학엘 가야지" 벼르고 있던 그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적극적인 구애로 결혼하고 말았다.
연달아 아이 셋을 낳고 군인인 남편의 임지를 따라다니느라 바쁜 전업주부 노릇을 십 년 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열정과 창조력은 가슴속에서 저절로 들끓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사촌언니 권유로 당시 최고급품으로 새로 나온 명주솜을 팔아보게 된다. 반응이 썩 좋았다. 사촌언니의 공장에서 나온 뉴똥천과 명주솜은 이영희의 손을 거치면 희한하게도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자투리 천으로 한복을 지어 입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해 그때 ‘한복이구나’싶었다.
맨처음 한복 가게를 차린 곳은 서울 서교동이었다. 발 디딜 틈 없이 손님이 밀려들었다. 곧 압구정동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이날까지 그의 별명은 색채의 마술사였다. 76년 패션의 본거지인 입구정동에 의상실을 낸 이후로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80년 서울에서 패션쇼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85년 오사카, 86년 브뤼셀, 88년 밀라노와 뉴욕, 그리고 모스크바로까지 한복들을 싸들고 다니며 미친 듯이 쇼를 했다. 92년부터는 딸 정우와 함께 기성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93년 한국 디자이너 최초로 까다롭기로 소문난 파리 프레따 포르떼 컬렉션에 참가했으며 94년 파리 바끄거리 109번지에 자신의 부띠끄를 오픈했다. 젊은 감각을 익히고 본격적인 양장디자인을 개발했다. 또 한국 최초로 생활한복을 만들며 항상 같은 디자인의 한복에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그는 패션쇼를 자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해에 10번에서 14번의 패션쇼를 계속하며 살아왔다. 패션쇼란 편안하게 안주해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기 위한 이영희의 노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절을 찾고 박물관에 들르고 염색법을 개발하고 출토된 옷들을 옛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바느질해 본다. 이영희 옷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 오묘한 빛깔에 있다. 새로운 빛깔을
얻기 위해 그는 전국을 헤매고 다닌다
석양 무렵 단청의 빛깔, 마루의 침착한 빛깔, 기와 지붕의 빛깔이 그를 통하고 나면 두루 새로운 아이디어가 된다. 박물관에서도 마찬가지다. 낡은 청동거울, 오래된 노리개들, 옥비녀, 무덤에서 출토된 옷들이 그에게 두루 영감을 준다. 영감만으로 옷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빛깔을 눈앞에 끌어내오기 위해 다양한 염색법을 시험한다. 진흙, 먹던 야채, 들꽃의 잎사귀로도 천을 물들여 본다. 이영희 쇼에서 세계인이 숨을 죽이는 섬유의 빛깔은 모두 그렇게 갖은 탐색 끝에 얻은 것이지 공장에서 손쉽게 염색한 화학염료의 결과가 아니다.
"민족옷으로 확인한 한민족의 감동"
디자이너 이영희가 평양에서 민족 의상전을 감동적으로 펼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은 2001년 초여름의 싱그러운 화제였다. 남측 모델과 북측 모델이 어울려 민족옷 한복을 함께 차려입고 무대 위를 걸었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얼마쯤 눈물겨웠다. 50년 넘게 나뉘어 살아왔지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같은 뿌리, 같은 피의 한민족임을 이영희는 뜨겁고 생생하게 무대 위에서 증명해 보인 것이다.
한복은 선의 옷이고 바람의 옷이고 빛깔의 옷이다. 이영희는 그 한복이 가진 아름다움의 최대치를 살려내는 사람이다. 타고난 재능에 피나는 정성에 쉴틈 없는 탐구가 곁들여 그는 한국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세계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세계인의 가슴속에 코리아 기모노가 아닌 한복(han -bok)이란 이름을 뚜렷하게 새겨 넣었다. 파리 프레타 포르떼에 첫 입성해 열렬한 환호를 받았고 2000년 6월 뉴욕 카네기 홀의 2,800석을 꽉 채우고 앉은 미국인과 교포들에게 한복의 아름다움에 열광케 했다.
"너무 늦은 시작은 없다"
이영희 한국의상을 문열었을 때 그의 나이는 마흔. 그는 지금도 말한다. 어떤 일에도 너무 늦은 시간은 없다고. 예순 둘인 1996년부터 그녀는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해외 패션쇼가 잦은데 언제까지나 통역의 입에 기댈 수는 없다는 판단으로..
그녀는 아무리 피곤하고 바빠도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수영을 1시간씩 한다. 나이를 운운하는 사람이 그녀는 아주 안타깝다. 그는 꿈이 힘이 되어 마침내는 반드시 그게 이루어지고 만다는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언제나 그랬었으니까.
그가 지금 가장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한복의 세계화다. 전통염색기법을 그토록 공들여 익혔던 것도 자연빛깔이야말로 세계 무대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우리 것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5월 뉴욕에서 제대로 된 쇼를 열어볼 계획이다. 힐러리를 위해 지어간 한복이 그녀에
게 아주 잘 어울렸듯이 미국인들에게도 한복을 응용한 선과 색을 입히고 싶다그의 꿈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꿈으로 안고 살기 때문에 그는 늙지 않고 생명력이 꿈틀거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꿈꾸는 자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저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도움말=이명석 한미경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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