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득, 후드득, 지붕을 때리는 빗줄기가 밤새 자장가를 들려주었다. 비가 오자, 메마른 산야에 우두커니 버티고 있던 나무들이 환호하며 춤을 춘다. 아사 직전의 대지는 푸르름을 선보이며 생명의 찬가를 부른다. 곳곳의 도로에서 마주치게 될 교통사고와 저지대의 침수피해에도 불구하고, 남가주에서 만나는 비는 축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문득, 메마른 나의 삶이 버려진 광야의 공허함처럼 느껴진다. 언제 생명을 주는 비처럼, 메마른 자들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했던가? 언제 살맛을 잃고 한숨을 토해내는 자들에게 격려로 충만한 소망을 전했던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활력을 잃은 나의 삶을, 감동이 새나간 제 삶을 거울을 보듯 마주해야 했다.
그래서 지붕에 부딪히는 빗줄기에도 부담이 되었다. 자장가처럼 들렸던 빗소리가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난타가 되었다. 빗소리보다 더 큰마음의 울림이 긴 밤 계속되었고, “이렇게는 안 돼”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하는 외침이 빗소리보다 더 큰 메아리가 되었다.
생명을 주는 비를 보면, 우리의 삶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하며, 남의 삶에 훈훈한 감동으로 기억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 말이다. 도대체 어느 한 순간도 남을 배려한 적이 없는 삶이라면, 삶에 어떤 기쁨이 깃들겠는가? 어디서 삶의 생명력이 솟아나겠는가?
옛날에 페르시아 왕이 여러 나라 출신의 현인들을 모아 놓고, 인류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한다. 현인들마다 인류에 해를 끼치는 여러 가지 죄악들을 제시했다. 그때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그런데 한 현인의 말에 왕은 가슴이 찔리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이 현인은 “암흑이 판치는 이 세상에 광명을 줄만한 선을 한 가지도 못 하고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악행을 저지르는 것만 해악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인류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이 현인의 대답이 왜 비가 오는 날 갑자기 생각났을까? 나의 삶이 그만큼 황폐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명을 주는 비를 보면서, 그 생명의 울림이, 삶의 활력소인 감동이 그리워서 생각난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서로의 삶에 감동을 주는 따사로움을 그리워한다. 선뜻 다가서지 못할 뿐이지, 그 감동에 목말라하고 있다. 나의 작은 손길이 남에게 작은 감동으로 전해지고, 그 감동이 또 작은
감동으로 되돌아올 때, 더 이상 나와 남으로 구분되지 않고, 나와 남의 경계를 뛰어넘는 ‘우리’로 하나가 되는 것을 고대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주는 비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기억되는 감동의 작은 파편이 되어도 좋다. 메마른 삶에 위로가 되는 한 송이 꽃이 되어도 좋다. 생명을 주는 비처럼.
함택/풀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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