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대표적이고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 세인트 피터스 버그 필하모닉이 얼마 전 디즈니 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연주회에서 이 오케스트라와 인연이 깊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을 들은 것은 오래 기억에 남을 일이었다.
신세계, 운명, 영웅 같은 표제가 붙은 유명한 교향곡들 중에서 ‘비창’ 만큼이나 표제에 맞는 사연이 있는 곡은 없는 것으로 안다. 우선 차이코프스키가 1893년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이 곡의 초연을 자신이 지휘한 그 다음날 러시아어로 Pateticheskoy(슬픔)란 표제를 붙였고, 불과 8일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부터 이 곡의 탄생은 심상치 않았다.
건강한 53세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은 유행병 때문이 아니고 그의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그가 속해 있던 그룹 동료들의 무자비한 권유에 따른 자살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믿고 있다. 그가 남긴 글에 이 곡은 인생을 그린 것으로 마지막 악장은 죽음이라고 쓴 것을 보면 끝나 가는 자신의 운명을 염두에 두고 이 곡을 썼는지 모른다.
러시아가 나은 가장 천재적인 작곡가가 이같은 비통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쓰고 지휘한 이 곡에 비창이란 표제는 너무나 적절하다.
이렇듯 이 작품에 내포된 ‘마지막’과 ‘죽음’이 마치 이 곡에 저주로 붙어버린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하는 일들이 기억난다. 해방 후 우리 나라의 유일한 고려교향악단은 비창 교향곡을 마지막으로 연주하고 6.25 동란이 일어나 해산되었다. 전쟁 중에는 해군 정훈음악대가 해군 대령이었던 첼리스트 김준덕씨 지휘로 비창을 연주했는데 얼마 후 이 지휘자가 세상을 떴고 정훈음악대도 해산되어 버렸다. 그 다음부터 한국의 음악인들간에는 비창을 연주하면 누가 죽든지 무엇이 끝장난다는 미신이 돌게 되었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빠르고 신나게 연주된 제3악장의 클라이맥스를 많은 관중들이 심포니의 끝으로 착각하고 폭발적인 박수를 터뜨리는 바람에 곧 이어져 비장하게 꺼져 가는 죽음의 마지막 악장 분위기가 망쳐졌다. 그러자 이런 창피스러운 관중에게 불쾌감을 보이듯 지휘자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총총 거름으로 무대를 나가 버렸다. 이 유명한 비창 교향곡을 그렇게 많은 관객이 잘 모른다는데 좀 놀랐다. 하여튼 완벽한 연주회를 경험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제삼 느끼게 한 저녁이었다.
김용제
<바이얼리니스트/안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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