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중남미 독립과 아메리카 제국
제306회. 아메리카제국 37. 제2차 세계대전 21.
오키나와 전투
미드웨이 해전의 승전 후 미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하여 일본 영토에 대한 공격의 발판으로 삼을 계획으로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상륙하였다. 일본군도 본토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는 오키나와 방어에 총력전을 선언하였다. 오키나와의 전략적 중요성과 단기간의 점령을 목표로 미군은 막대한 장비와 병력을 동원하였다. 미일 양국이 드디어 2차대전 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에 돌입한 것이다.
미국은 오키나와 점령을 위하여 18만3,000의 병력, 40척의 항공모함, 18척의 전함, 200척의 구축함, 소해정 등 총 1,321척으로 구성된 사상 최대의 함대를 편성하였다. 미 정보국의 판단에 의하면 오키나와에는 6만 정도의 일본군이 200문 정도의 대포로 방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이는 대단한 오판이었고, 처음 1개월 이내에 함락하려던 목표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수반한 채 3개월이나 질질 끌었다.
오키나와 전투는 육지와 바다 그리고 공중 즉, 육해공 삼면의 입체적인 전투였고, 전투의 규모, 크기 그리고 격렬함에 있어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처참하고도 치열한 전투였다.
3개월간의 전투로 일본군 12만 중 11만이 전사하였고 전함 야마토를 포함한 16척의 전함이 격침되었으며, 수만톤의 상선과 수송선이 침몰되었고 7,800대의 비행기가 격추되었다. 미군은 1만3,000이 전사하였고 3만6,000이 부상하였으며 36척의 전함을 상실하였다.
일본 사람들 참으로 독한 것이 12만 중 11만이 전사할 때까지 버틴 것을 보라! 항복한 병력은 수천에 지나지 않았고, 전사자 모두가 옥쇄 명령을 지켰던 것이다. 또한 섬의 주민들과 부녀자까지 동원하였기 때문에 오키나와 출신의 군속 및 군인 5만여명과 주민 10만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치열했던 오키나와 전투는 섬의 남단에 포위되어 있던 우시지마 중장의 잔존 부대가 전멸함으로써 종결되었으며 우시지마 사령관과 참모들은 모조리 자결하였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승리하고서도 충격이 컸다. 지금까지 전투에서 이런 독종들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끼리의 전투는 치열하다 하더라도 전세가 기울면 항복하고, 승리자는 여유를 보이는 그런 전투였지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죽기살기로 대드는 이런 전투는 경험한 적인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 상대의 본토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인식이 원자탄의 투하를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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