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말엽의 한국사회는 극도로 부패하여서 관직을 사고 파는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관찰사 직은 20만냥에, 고을 수령 직은 5만냥에 매매되었고, 그렇게 해서 관직을 얻은 자들은 부임즉시 그 돈을 채우기 위해 공금을 횡령하거나 백성들을 착취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패한 관리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부패한 관리들을 고발해서 처벌받도록 하는 일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당시의 조선인구는 1,000만명이 조금 넘었고, 기독교 신자는 약 800여명 정도였다고 하니까 비율로 보면 0.1%도 되지 않는 셈이다. 1%도 아닌 0.1%, 그것도 부자나 지식인이 아닌 가난한 서민들이었지만 그 당시 사회는 이 사람들을 두려워할 정도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그 영향력의 본질은 무엇일까? 은사나 직분 혹은 신앙 연륜도 아닌 정직이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정직은 능력이다.
오늘날 이민교회를 포함한 한국교회가 숫자와 상관없이 야성을 상실한 동물원의 맹수로 전락한 것은 정직의 상실에 있다. 초기 한국의 교회사에 의하면 집사라는 직분으로 어디서나 쌀 한 가마니를 그냥 빌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슬프게도 가장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우리는 정직의 위기시대를 맞고 있다. 정직의 위기는 사회에 불행을 가져온다. 생명을 해친다. 조그만 식품 제조공장에서의 정직하지 못함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해치는 것을 우리는 여전히 본다. 한 나라의 정직하지 못한 것이 세계를 불행하게 한다. 1986년 챌린저호 폭발 참사도 조그만 부품의 문제점 앞에 정직을 선택하는 대신 관료주의라는 허위의식으로 가리웠을 때 엄청난 비극을 가져왔다.
정직의 위기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의 회복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불행의 시작은 사소한 거짓말, 위선, 체면, 겉치레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용기를 내야 한다. 단 한번의 용기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 사회를 복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이민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정직의 탁월성을 드러내는 몸부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직에의 용기, 정직의 능력, 정직의 행복이 우리의 삶의 덕목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 보면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복이란 말의 원래의 뜻은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정직은 능력이요 행복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을 기억하자. “하루를 행복하려면 목욕을 하십시오. 1주일을 행복하려면 새 옷을 사 입으십시오. 3개월 행복하려면 말을 타십시오. 3년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십시오. 그러나 일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직하십시오.”
김 병 호
(횃불교회 목사)
(LA 기윤실 실행위원) (213)387-1207. www.cemkl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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