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십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그날’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가 말하는 ‘그때 그날’이란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하던 9월15일을 말한다.
6.25때 많은 서울 시민들이 한강다리가 일찍 끊어지는 바람에 피난을 못 갔다. “국군이 지금 반격하여 북진중이니 염려 말라”는 녹음방송을 정부관리들이 틀어놓고 남쪽으로 도망간 줄도 모르고 순진한 국민들이 피난 갈 준비를 서두르지 않은 것이 그 이유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처음 한달은 식량도 배급 주고 분위기도 부드러운 편이었다. 그러다가 쌀 배급량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배급이 끊어져 식량난이 서울에 닥쳤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재도구를 머리에 이고 나와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방산시장 거리에서 쌀과 바꾸어 먹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끼니를 건너는 집이 많았다. 점심만 먹고 아침과 저녁은 식량을 아끼기 위해 굶는 것이다.
게다가 반동분자 검거선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네마다 인민재판이 열려 서울 한복판에서 몽둥이로 사람을 패 죽이는 끔찍한 장면이 벌어졌다. 당시 반동분자는 국군가족, 경찰가족, 청년단, 공무원, 기타 직장의 간부들이었는데 한 다리 건너면 친척 중에 ‘반동분자’ 없는 사람이 없어 집집마다 전전긍긍했다.
맥아더가 언제 서울을 재탈환 하나. 이것이 서울시민들의 꿈이요, 희망이었다.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에서 인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데 미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서울까지 진격하려면 몇 달이 걸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서울시민들은 굶어 죽을 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정확하게 말하자면 1950년 9월14일 새벽이다. 인천 쪽에서 포성이 들리더니 서쪽 하늘에서 번개와 비슷한 섬광이 쉴새없이 계속 되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 함포사격이었다. 당시는 전시라 소등상태여서 인천의 섬광은 유난히 빛났다. 그때의 감격적인 섬광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연합군은 9월15일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서울은 9월28일 재탈환되었다. 9월14일부터 28일까지의 보름은 ‘일각이 여삼추’-그야말로 하루 지나는 것이 한달 지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서울에 진입한 후 시가행진하는 한국군 해병대와 미군 해병대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 처럼 느껴졌다. 인간에게 자유가 얼마나 귀중하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한 순간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이 없었더라면 수많은 사람이 전쟁터에서 더 죽었을 것이고 인민군의 계획적인 남한인 학살도 엄청났을 것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은 기습적이었기 때문에 인민군들도 서둘러 후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것이 내가 초등학교 시절 겪은 맥아더의 인천상륙과 서울수복의 체험이다.
요즘 한국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것은 물론 맥아더는 살인자라는 노래까지 나온 모양인데 이것은 역사바로잡기가 아니라 반미운동 확산을 겨냥한 고의적인 역사 뒤집기라고 생각한다. 맥아더가 살인자인가 은인인가는 당시 9.15 인천상륙과 9.28 서울탈환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모아 평가를 내릴 일이지 현장도 목격하지 않은 젊은 세대의 진보세력이 미국이 밉다하여 맥아더를 “살인자 운운”하는 것은 역사왜곡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맥아더 동상은 올바른 역사해석을 위해서도 지켜져야 한다.
이 사
chul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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