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이되면 생생하게 그날 그때의 상황을 되새기는 습관이 올해로 38번째다. 바로 1968년 1월 21일에 일어난 일이다.
두달 후면 군복무를 끝마치고 대학원 진학과 미국 유학을 위한 시험준비를 하려고 1월10일부터 20일까지 10일간의 공식 휴가를 얻었다. 연세대 도서실에서 공부하려고 근처 하숙방을 구했다. 그런데 시험준비에 몰두하기 8일만인 18일에 부대 복귀명령이 떨어졌다. 이유인즉 정체불명의 소대규모 집단이 특수부대 훈련을 빙자하고 우리 검문소를 통과하면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상부에 전달되어 군경에 경계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 정체불명의 집단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할 목적으로 남파된 김신조 외 30명의 북한 공작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들이 청와대 근처에서 군경과 대치, 정면 교전한 21일이었다. 이로 인해 김신조는 생포되었고 나머지는 사살되었으나 우리의 애꿎은 시민의 희생 등 피해가 막심했다.
설상가상으로 이틀 후인 23일에는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동해에서 납치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는 바람에 “이제는 3차대전이 한반도에서 터지는구나”하는 긴장감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북한 공작대가 2년동안 모래주머니를 무릎에 차고 훈련을 했다고해서 우리 부대도 장사병을 불문하고 영내에 거주하면서 완전 군장에 무릎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헌병학교가를 수만번 외치며 김포공항을 왕복하면서 구보하곤 했던 것이 어제 같이 느껴진다.
북한 공작대가 청와대 근처까지 오도록 방비가 허술했음과 아까운 시민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문제도 불거졌다. 그 당시 청와대 주변과 경기도 일대를 관할하는 최고 군 책임자는 6관구 사령관이었던 김재규 장군이었다. 그러나 사령관 대신 부사령관이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나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부사령관 사무실에 가서 거수경례를 하고 “각하, 사령부 헌병 참모실로 가셔야 하겠습니다”하고 정중히 동행한 바 있으며 그 분은 결국 직위해제와 동시에 불명예 제대를 했다.
그간 지나간 많은 과거지사 중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그리고 잇따른 12.12사건을 떠올리면서 가정을 해본다. 만약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1.21사태의 책임자로 부사령관 대신 사령관인 김재규를 처벌했다면 그의 운명과 한국의 정치현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1월이면 항상 그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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