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굳게 닫힌 마켓문 옆에 검은 부조(浮彫)처럼 서있었다.
새벽을 걸어온듯 헝클어진 머리와 긴 수염과 낡은 재킷이 축축히 젖어있었다. 마켓 문을 열고 불을 켜자 노인이 들어와서는 24온스 캔 맥주 두 개를 집어들었다.
새 술꾼이시군 하며 바라본 노인의 눈이 맑고 푸른 것에 내심 깜짝 놀랬다. 오른쪽 다리를 절며 나가는 노인의 뒷모습에서 잉카여인과 스페인 군인 혼혈의 후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노인은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문 옆에 서서 나와 눈이 마주치면 두 손가락 혹은 세 손가락을 들어 보이곤 했다.
그렇게 노인은 하루에 세번, 오전. 오후. 그리고 문닫을 시간쯤, 단 하루도 거르는 일없이 거의 같은 시간에 술을 사갔고 아침부터 해지기 전까지 마켓 뒤 파킹랏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곡기(穀氣)를 끊은 것이 분명했다. 음식을 갖다주면 고맙게 받았지만 한 조각도 입에 대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술만 마시면서도 한번도 걸음걸이가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노인의 자리에는 언제나 하루 종일 햇살이 따가웠지만 한 여름에도 노인은 낡은 재킷을 입고 한치도 꼼짝없이 앉아있었다.
이따금 노인이 자리를 비울 때에도 그의 그림자는 양지 속 깊이 박혀 있었고 날마다 그의 그림자는 짙어만 갔다.
멀리서 바라볼 때면 그의 그림자위로 이내가 감돌았다.
이따금 노인에게 술을 건네 줄 때면 그의 몸에서 무엇이 타는 듯한 비릿한 냄새가 풍기곤 했는데 그것을 나는 홈리스들의 몸에 배어있는 악취와 찌든 술 냄새와 방랑자들의 몸에 밴 흙먼지 냄새일 꺼라고 생각했다.
햇살 따가운 2월의 어느 날, 파킹랏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서 노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 노인이 햇살에 자신을 말리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 누구도 모르게 햇살을 끌어 모아 생(生) 목숨을 화장(火葬) 하고 있는 노인.
그날 따라 노인은 바싹 말라보였고 툭- 건드리면 그대로 한줌 재가 되어 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날 밤 마켓 문을 닫기 직전 노인은 술을 사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어딘가를 갔다올 데가 있다고. 그가 다시 올 때 알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며 노인은 웃으면서 나갔다. 그것이 노인을 본 마지막이었다.
몇주가 지난 어느 날 밤, 집으로 가기 위해 파킹랏으로 나갔다.
노인의 자리를 지나가다 문득 아직도 남아있는 노인의 그림자를 들여다보았
던 것인데 나는 그만 그가 파놓은 광중(壙中), 저 깊고 깊은 곳으로 빛들이 한 점으로 모여들고 화르르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윤홍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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