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락 기자의 다큐멘터리 ‘타운 50년’
“1세는 밀어주고, 1.5세는 앞장서고”
본보 1983년 3월9일자 유현수(작고) 논설위원의 칼럼 ‘태평양’에는 “1.5세, 미래의 주역이자 희망의 세대”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우리 커뮤니티에서 ‘세대’란 말을 쓸 때는 적지 않은 혼란이 따른다. 한국인 미주 이민사는 1903년 하와이 노동이민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이들 선배 이민자들과 70년대 이후 대량 이민시대의 새 이민자들 사이엔 세월따라 굳어진 ‘단절’이 있다(중략). 1.5세는 새 이민 1세를 따라 미국에 왔거나 이곳서 태어나 미국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을 지칭한 것. 굳이 ‘1.5세’를 자처한 것은 과거 ‘2세’들과 달리 한국 전통과 언어를 체득했고,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강하게 느낀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옛 ‘2세’들을 ‘단절의 세대’라고 한다면 ‘1.5세’들은 ‘교량의 세대’이다” 유 논설위원의 이 칼럼은 당시 뜻있는 젊은이들의 역할과 가능성, 그리고 기대의 표현이었고, 그 속에는 출발한 한미연합회(KAC)에 대한 격려가 담겨 있었다.
‘KAC 태동기’1982년 본보와 함께 진행된 4개월간의 유권자 등록운동을 마친 추진위원회 관계자들이 본보 사무실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 이 운동을 통해 4,000여명의 새로운 한인 유권자가 탄생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정동수씨, 신창규씨, 최영용씨, 임동선 목사, 주경자씨, 김기순씨.
1982년 본보 유권자 등록 운동이 시발점
김기순씨 등 재정지원 이사회 결성
정동수·찰스 김 등 대학생들 조직 맡아
‘1~2세 연결·커뮤니티 대변’천명
1982년 봄, 2세 육성사업에 초석을 다지고 있던 김기순씨(당시 제록스사 엔지니어·고 김명한옹 넷째아들)는 당시 본보 조창현 편집국장으로부터 제안을 하나 받았다. 그해 실시될 중간선거를 겨냥,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을 위한 유권자 등록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 김씨는 곧바로 임동선 목사(동양선교교회 원로목사), 최영용 목사(작고·연합감리교회), 서동성 변호사, 주경자씨(부동산업), 제니퍼 최씨, 신창규씨(당시 다이얼 운전학교 운영), 그리고 당시 UCLA 법대에 재학중이던 정동수씨(현 KOTRA 인베스트 코리아 단장·변호사) 등을 모아 ‘한인 투표권자 등록추진위원회’를 조직했다.
본보 후원 속에 4개월 동안 펼친 이 사업을 통해 4,000여명의 한인유권자가 탄생했다. 한인사회 최초의 유권자등록 운동은 이렇게 시작했고, 대성공을 거뒀다.
이 운동은 영어권 2세 젊은이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만들었고, 이는 유현수 논설위원의 기대와 희망대로 한인사회와 주류사회간의 연결고리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한미연합회(KAC) 설립의 계기를 제공했다.
정동수씨는 유권자 등록이 끝난 뒤 영어를 사용하는 1.5-2세 한인학생들을 하나로 묶겠다는 구상을 갖고 김기순씨를 만나 이를 논의한다. 당시 한인학생회란 조직이 있었지만 유학생들이 중심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얘기지만 정씨가 이같은 제안을 한 배경에는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인한 서로간의 대화가 원만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영어권 한인학생회 조직을 논의했던 것이 KAC 탄생의 씨앗이 된 셈이었다.
정씨의 얘기를 들은 김씨는 반드시 영어를 사용하는 단체로 이끌 것을 주문하면서 지원을 약속한다. 1956년 유학왔던 김씨는 이미 한인사회에 권익옹호와 차세대 지도자 육성을 위한 영어권 단체의 필요성이 갖고 있던 터여서 오히려 이를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체조직 선봉에는 정씨와 찰스 김씨(당시 USC 3년), 던컨 리(당시 UCLA 3학년·변호사)씨 등이 나섰다.
김씨도 이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할 이사회 조직에 박차를 가했다.
초기이민 2세였던 데이빗 현(건축가), 김영옥 대령(작고), 도산 안창호 선생 막내아들인 랄프 안, 최복림 UCSD 교수, 이경원(언론인), 일레인 김(UC버클리 교수), 박대희 목사, 아이린 최 앤젤리나스 라이오니스 클럽 회장, 의사였던 루크 김·그레이스 김 부부가 참여했다.
데이빗 현씨는 독립운동가였던 현순 목사의 아들이자, 작가로 잘 알려진 피터 현씨의 친동생이다. 또 이사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루크 김씨 부부의 아들 데이빗 김씨는 현재 MTA의 워싱턴 수석 로비스트로 활약중이다. 이밖에 이경원씨는 당시 새크라멘토 유니언지 기자로 활동하며, 한인타운에서 ‘코리아 타임 위클리’란 영자 주간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KAC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젊은 학생들은 한인회에 도움을 청하기도 했으나, 한인회측은 산하 청년회로 조직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 무산되기도 했다.
1982년 11월 첫 모임을 시작으로 3개월의 준비작업 끝에 1983년 2월13일 데이빗 현씨가 초대 이사장을, 정동수씨가 초대회장을 맡으며 KAC가 공식 발족됐다.
창립식에서 KAC는 한인사회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대한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1세와 2세의 연결고리를 수행하며, 한인사회의 사회적 의식과 양심의 함양을 위한 활동에 선봉에 설 것임을 천명한다.
주류사회에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KAC는 이렇게 탄생하게 됐다.
KAC를 얘기하기 위해서는 ‘한인시민연맹’
(AKCO: Amrican Korean Civic Organization)과 청소년 후원회(KAYF: Korean American Youth
Foundation), 그리고 당시의 사회상을 빼놓을 수 없다.
1959년 창립된 AKCO는 당시 LA시장 선거에서 한인들의 정치력을 보여주기 위해 조직됐으며, 초기 이민자 후손들인 찰스 윤(한인사회 최초 치과의사), 필립 안(영화인·작고), 워렌 리 목사(이화목 장로 아들), 사업가였던 월터 백(작고)씨 등 완전 영어권 인사들이 주축을 이뤘다.
또 김기순씨(당시 칼폴리 포모나 4년)가 유일한 유학생 신분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크렌셔와 익스포지션 인근 언덕에 위치한 백씨의 집에 모여 발기인 대회를 갖고 한인사회 발전에 공헌할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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