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시장과 한인들 <1>
70~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의‘젖줄’
1970년대 초 한인타운에서는 재미있는 말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청바’라는 단어로 ‘남자는 청소하러, 여자는 바느질’이란 뜻의 당시 한인사회 경제용어였고, 그만큼 한인들의 일자리가 한정돼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와 유사한 또다른 말이 있었는데 “밟아라 삼천리”로 생계를 위해 잠을 아껴가며 봉제업소에서 미싱일에 매달리던 한인여성들의 한 고된 생활상을 전한 것이다.
경기호황 일감 넘쳐 너도나도
‘주당 400달러’당시로는 고소득
귀부인들까지 ‘밟아라 삼천리’
한때 전체근로자 95%가 한인
자바(Jobber)시장. 지역적으론 LA 다운타운의 봉제 및 의류 시장으로 대표되는 단어지만, 한인들 사이에서는 한인타운의 경기를 진단하고 전망할 때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된다. 심지어 “한인타운의 밤 문화가 자바시장의 경기에 달려 있다”는 우스개 얘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한인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만 해도 ‘자바’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이 지역의 봉제와 의류사업이 발전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는 ‘봉제구역’(Garment District)로 통했다. 그러다 관련 사업들이 번창하면서 이 단어가 생겨나게 됐다.
아무튼 오늘날 한인사회 경제발전의 바탕이 된 자바시장의 시작이 봉제에서 시작됐음은 누구나 부인하지 않는다.
정확히 가장 먼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한인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자바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한인들의 얘기를 빌자면 1969년 폴 감(감이대·작고)씨가 처음 봉제업을 시작했다는 설과, 70년대 초 ‘혜미 엄마’로 불리며 본보에 자주 재봉사 모집광고를 게재하던 이모씨란 설이 있다.
<창립 초기 봉제협회 회원들이 올림픽가에 위치한 뉴코리아 식당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해 발표자의 얘기를 듣고 있다. 맨 오른쪽이 서정원씨. 이 식당은 당시 스칼렛 엄 현 LA한인회 이사장 소유로 타운에서는 최고급 한식당이었다.>
당시 자바시장은 유대인들이 봉제와 의류 모두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또 경기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지만,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한인들은 봉제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러나 70년대에 진입하면서 봉제 일이 돈이 된다는 얘기가 조금씩 퍼지면서 한인들의 자바시장 진출이 시작된다.
그 당시 봉제업계의 경기가 얼마나 호황이었는지는 한인들의 수입에서 확연히 구별된다.
당시 11가와 레익뷰 지역에 위치한 한인술집 ‘도라지 바’에서 팔리던 맥주 한병이 50센트, 그리고 시중에서 구입하는 담배 한갑이 15센트였다. 또 대략 20-30달러면 일주일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데 부담이 없었고, 괜찮은 방 한칸짜리 아파트 렌트비가 월 120달러 정도였다.
반면 봉제업소에서 일하던 한인여성들은 일감을 집에까지 가져와 일할 경우 많게는 주 400달러를 벌기도 했다.
이처럼 수입이 좋다보니 한인여성들의 다운타운행이 줄을 이었다. 그중에는 한국에서 이민온 장군의 부인과 교수 부인, 연예인, 그리고 심지어 LA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외교관들의 부인들까지 포함돼 있었다.
또 한인여성들의 이민사회 초기 봉제분야 진출이 줄을 이은 것은 이들의 바느질 솜씨와 눈썰미가 타인종 여성들보다 월등했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한인들이 봉제업 진출에 눈을 돌리게 된 또다른 배경은 합법적인 체류신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전문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회사가 스폰서만 서주면 영주권을 얻는데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인들의 봉제업 진출 러시가 활기를 띠면서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인 봉제업소 직원의 95% 이상이 한인들이었다.
1970년대 초 봉제업에 손을 댄 인사로는 최근 봉제업을 정리하고 은퇴한 안이준씨(현 한미은행 이사)를 비롯해 안종식씨, 이원준씨, 서정원씨, 양효길씨 등이 손꼽힌다. 특히 서독광부 출신들이 한꺼번에 이 분야에 진출했는데, 1965년 독일에 갔다가 68년 초 미국에 들어왔던 안이준씨가 1972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봉제업에 뛰어들자 서독 아켄 탄광에서 함께 광부로 일하며 동고동락했던 안종식, 천영철, 김한현, 김성학씨 등이 곧바로 이 분야에 발을 들여 놓았다.
또 서정원씨는 한국에서 양복점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어 당시 봉제업에 종사하던 한인들 가운데는 그래도 적응이 빨랐다고 한다. 서씨는 수년 뒤 봉제협회 설립과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1977년 조직된 봉제협회는 나름대로의 경제력과 인력을 바탕으로 한인사회 발전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변창환, 김히영, 한삼권(작고), 이원준, 안이준, 박창훈, 김시용씨 등이 주요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초창기 한인 봉제업계는 영세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전문지식이 전무하고, 경험조차 없는 상황에서 한인들은 생존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한인 업주들은 유대인 회사들을 찾아가 일감을 받아와 밤을 새가며 일해 기일을 맞추는 고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안이준씨는 “정말 미싱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봉제업에 뛰어든 탓에 6개월 정도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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