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1942~) ‘식구’ 전문
감자를 먹었다.
심지를 낮춘 등잔불 아래
저녁 식탁에 모여 앉아 감자를 먹었다.
아버지는 오시지 않고,
이른 봄 황사 바람만
담벼락에 묶인 시래기를 흔들고 가는데,
심지를 낮춘 등잔불 아래서
구운 감자를 먹었다.
동치미 사발에 파란 파가 떠 있었다.
아버지는 오시지 않고,
날은 어둔데, 하늘엔
철새들이 가는지,
스척스척 날갯짓 소리가
등잔불 심지를 흔들고,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감자를 먹었다.
아버지가 오시지 않는 저녁,
식구들끼리 둘러앉아 감자를 먹었다.
이제, 감자 굽던 어머니도
감자 먹던 형도 안 보이는데,
이따금, 저물녘 지붕 위의 철새 소리를
듣고 싶은 때가 있다.
심지를 낮춘 등잔불 다시 켜고
감자를 먹고 싶은 때가 있다.
식구라는 말처럼 무거운 말도 없다. 식구처럼 눈물겨운 말도 없고, 식구처럼 다정한 말도 없다. 식구처럼 그리운 말도 없고, 식구처럼 고통스러운 말도 없다. 식구보다 더 식구 같은 말은 물론이지 세상에 없다. 식구(食口), 그 서러운 입구여! 살아선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기막힌 구멍이여. 흔들리던 등잔불 아래 감자를 먹던 식구는 내게도 있었다. 세월처럼 폭폭해서 숨통이 꽉 막혔던 감자…….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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