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일이었다. 어느 날 아침 친구 이재순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들어왔다.
“얘들아, 내가 김기창씨 만나러 갔지 않았겠니. 근데 말이야, 박내현이가 왔더라. 둘이 아랫목에 깐 포대기에 발을 같이 넣고 있는 거야” 그 말이 떨어지자 우리는 와~ 하고 떠들며 웃어댔었다.
그때 김기창씨는 서른이 넘은 노총각이었고 박내현씨는 동경여자미술학교를 갓 나온 처녀 화가였다. 두 분은 그 후 곧 결혼을 했는데 첫 아들을 낳고 바로 또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인기만화였던 ‘왈순 아지매’로 기억되는데, 앞머리를 말아 올려붙인 든든하게 생긴 아줌마가 아기를 업고, 한쪽 손을 내려 다른 아이의 손목을 잡고 서있는 만화를 보고 얼마나 재미있어 했던지…
박내현씨는 그렇게 아이들 엄마가 되고 좋은 아내로서 귀가 나빠 말이 불편한 남편을 위해 김기창씨 입에다 손바닥을 대고 발성연습을 열심히 시킨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김기창씨는 거의 불편 없이 정상생활을 하며 타고난 재주를 마음껏 발휘하고 오늘날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은 거장이 되었으니 부인의 힘이 컸다고 나는 본다.
우향 박내현씨는 사생활을 떠나서도 실력 있는 여류화가로서 작품 제작에 대한 의욕이 대단하여 어느 해였던가 국전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타기도 했었다. 여류화가로는 처음 있은 일이었다.
어느 날 우향 선생이 내게 냉면을 사주시고 다방에 데리고 가서 긴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봐 순련씨, 중도에 그만 두면 안 돼. 국산화가 1호잖아. 끝까지 그리자고. 여성 화가들이 너무 약해. 남자들보다 이래저래 일도 많고 힘든 입장이지만 아무도 이해해주려고 하지는 않고 우리를 경쟁자로만 보고 있어요” 그날 선생을 따라 성북동까지 택시를 탔다. 실개천을 뛰어 넘고 아담한 한옥에 들어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말을 잃었다.
세상에! 긴 방을 좌우로 갈라 두 분의 작품들을 벽을 향해 겹겹이 세워 놓았는데 모두가 보기 드문 역작들이었으니… 두 분은 작업을 하실 때 자기 작품을 향해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 일한다고 했다. 나는 정말 부러웠다. 부부화가, 진짜 멋있구나…
두 분이 서로 알게 된 것은 우향 선생이 미술학교에 다닐 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운보 선생의 작품을 보고 감동이 되어 작가를 만나보기 위해 여름방학에 댁으로 찾아갔었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니 할머니 한 분이 뜰에 계시다가 방 쪽을 향해 “얘, 손님이 오셨다” 하니까 문이 열리며 건장하고 잘 생긴 청년이 나오더라고. 작품 성숙도로 보아 중년이 넘은 작가를 상상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얼굴을 붉히며 쳐다본 것이 첫 대면이었다는 것이다. 운보 선생이 한 마디 끼신다. “내가 그때 말이지, 내게 손님이 찾아올 리가 없는데 문을 여니까 양산을 받치고 여자가 서 있었어. 너무나 황홀해서 천사가 온 줄 알았지” 두 분이 마주 보며 웃으신다.
1960년대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부부가 함께 갔다가 귀국 길에 부인은 뉴욕에 남았다. 혹 전시장에서 운보 선생을 뵙게 되면 “우향 선생 언제 오세요?” 하고 여쭈어보곤 했는데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미국에 더 있고 싶으대” 늘 같은 대답이었다. 그 우향선생이 뉴욕에서 영영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 분의 40대 중반의 모습을 떠올리며 목 놓아 울고 말았다.
운보 김기창 하면 한국 화단의 거장으로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꽤 오랜 동안 보이지 않았던 우향 박내현을 안다고 나설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어 내가 아는 바를 적어보았다. 한국 화단 제1호 부부화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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