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자 할머니는 매일 아침이면 애난데일 자택에서 폴스처치의 한 아파트로 달려간다. 그곳에는 김 할머니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병석(病席)의 친구가 있다. 장보기부터 시작해 미음을 끓이고 환자를 일으켜 먹인 다음 다시 눕힌다. 때론 환자의 목욕도 시키고 화장실도 데려가 용변 누이기도 돕는다. 그러다 보면 점심 때. 다시 식사를 해먹이고 환자의 아픈 몸을 주물러주고 집안일도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가 훌쩍 넘어간다. 매주 이틀 찾는 병원 나들이도 그의 몫이다.
끝도 없을 간병인 역할을 자청해온 게 벌써 7개월째다.
올해 여든 하나. 스스로 몸 가누기조차 힘든 나이인 김 할머니가 연하의 친구인 김흥주 할머니(77)의 간병인 역을 시작한 건 지난해 말. 한국 여행 도중 김 할머니가 그만 중풍으로 쓰러진 것이다. 입원했다 귀국했으나 김흥주 할머니를 도와줄 가족이나 지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인 남편은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쳐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였다.
“이 친구가 노인회 다닐 때 절 많이 도와주고 잘해줬어요. 그 은혜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덜컥 쓰러진 게 아닙니까. 가족이나 누가 돕는 사람이 없는 어려운 처지인걸 알고 내가 아직은 힘이 있으니까 도와야겠다고 나선 겁니다.”
두 할머니의 친분이 맺어진 건 5-6년 전 워싱턴한인노인회에서. 평소 활달한 성품인 김흥주 할머니가 부회장, 김영자 할머니는 부녀부장으로 일하며 가까워졌다. 그 짧은 인연이 피붙이도 아닌 병자와 헌신적인 간병인의 관계로 이어진 것이었다.
김영자 할머니가 김흥주 할머니에 쏟은 정성은 지극하다. 지난 7개월간 몸이 너무 아파 사흘간 쉰 것 외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친구를 찾아 돌봤다. 그에겐 주말도 없었다. 그러다 그만 자신이 병이 날 정도였다.
김흥주 할머니는 “저 언니가 매일 정성으로 날 간호하다 진이 다 빠졌다”며 “두어달 전부터는 의사가 ‘환자가 환자를 돌본다’며 만류해도 계속 나온다”고 말한다.
‘간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병자의 몸을 돌보는 것보다 더욱 힘든 건 병자의 정신적인 고통마저도 함께 해주며 시달려야 된다는 것.
“병자를 부축하고 다니다 보면 밤에는 팔이 아파 잠을 못잘 정도예요. 몸살도 여러 번 나고…. 그래도 제가 없으면 ‘언니, 왜 안 오느냐’고 우는데 안 갈 수가 없어요. 내가 쓰러지면 저 친구를 돌볼 수 없을 것 같아 매일 새벽에 걷기 운동도 하고 그래요.”
다행스러운 건 지난주부터 신부연 할머니가 간병을 도와주어 한결 힘이 되고 있다.
몇해전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는 김영자 할머니는 “솔직히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로운 적도 많아요. 그래도 어떡합니까. 서로 외롭고 힘들 때 돕고 살아야지요”라며 활짝 웃는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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