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러스 페스티발 축제가 끝난 후...
처음, 그를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마이크를 잡았을 때도 “저치, 누구야?”하는 무덤덤한 반응뿐이었다. 하지만 축제가 끝날 무렵 그는 코러스의 빛나는 아이콘이 되어 있었다. 제9회 코러스 페스티벌의 사회자(MC)였던 박은경씨(사진). 잔 주(John Joo)씨와 공동으로 사회를 본 박씨는 사흘 내내 오전 11시에 ‘출근’해 밤 8시가 되어서야 마이크를 놓았다. 피곤도 할 법한데.
“제가 하루 종일 서서 사회를 보니까 힘들어 보이나 봐요. 근데 저는 하나도 힘 안 들어요. 무대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단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갈수록 그의 엔터테이너 DNA는 돋보였다. 피할 수 없는 섭리에서 솟아난 익살과 재치로 무대의 단내를 풍기게 했다. 격정적 연설 대신에 객석의 마음에 파고들어 심리전으로 그들을 열광케 했다. 출연자가 쑥스러워할 때는 웃음의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출연자가 당황해할 때 그는 찜질방의 아줌마처럼 느긋함을 안겨주었다. 객석이 썰렁해지면 막춤을 추며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코러스 축제에서 그는 군중의 마음을 휘어잡는 유능한 선동가였다.
“저는 출연자나 관객 모두 편안하고 정형화되지 않은 스타일로 무대를 끌고 가려 해요. 음담(淫談)과 야담(野談)도 많이 섞어요. 적어도 제 행사장만큼은 웃음 가득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워싱턴에서는 생소한 인물이지만 적어도 뉴욕에서는 ‘박은경’이란 이름 석 자를 모르면 ‘간첩과’로 분류될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회갑연, 돌잔치, 송년회, 동문회, 결혼식 등 각종 행사마다 ‘박은경이 사회를 봐야 분위기가 뜬다’는 속설이 생겨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뉴욕 한인커뮤니티의 최대 행사인 추석대잔치 사회는 도맡아 진행했다.
“뉴욕 축제는 워싱턴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규모가 크고 짜임새가 있어요. 그렇지만 워싱턴은 한국식이라기보다 미국식에 가깝고 내용도 알찬 편입니다.”
그의 MC의 힘은 타고난 재능에 오랜 경험이 밑바탕 됐다 할 수 있다. 박씨는 1989년 MBC 개그맨 공채 3기생으로 데뷔해 2년여 활동하다 ‘체질에 맞지 않아’ 전향했다.
교육방송(EBS)에서 ‘직업의 세계’ ‘우리 자랑 학교 자랑’ 같은 프로그램 리포터로 활동하다 교통방송에서는 개그맨 선배인 고영수씨와 공동으로 입담을 과시하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96년 도미한 그는 뉴욕의 한인 방송국에 몸을 담은 후 각종 행사 단골 사회자로 명성을 떨쳐왔다. 뉴저지에서 식당도 운영했다. 버지니아 훼어팩스로 이사를 온 건 불과 3개월 전. 식당 경영상 문제가 생긴데다 노폭에 시부모님도 계시고 워싱턴에 직장이 생겨 내려오게 된 것이라 한다.
“워싱턴 지역은 동네도 깨끗하고 조용한데다 사람들의 지적수준도 높으며 점잖아서 마음에 들어요.”
사실 코러스 축제는 워싱턴에서의 데뷔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사흘간 자원봉사자로 무대에 서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객석의 기쁨이 한동안 실의에 찬 그를 다시 고무시켰다. 앞으로 그는 워싱턴에서 중년의 꿈을 가꾸려 한다.
“자식들 잘 키우고 이민생활에 지친 우리 한인들에게 더 많은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 생각해요.” <이종국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