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동 한국사진작가협회 워싱턴 지부장(66). 막 뽑아낸 인화지처럼 기억도 생생하다. 1969년 지인이 선물로 준 카메라에 대한 호기심이 그를 사진의 길로 이끌었다. 72년 큰 아들이 태어나자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욕망에 당시로서는 신기종인 아사히 펜탁스 K2를 구입했다. “아들과 경복궁에 놀러가 찍은 사진을 찾으니 컬러예요. 깜짝 놀랐어요. 그때만 해도 흑백만 있지 컬러 필름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카메라가 생기자 DP점(사진관)을 들락거리게 됐고 사진 서클에도 가입해 활동하면서 책자와 잡지 등을 통해 사진 공부를 본격적으로 했다. 75년에는 한국사진작가협회 정회원이 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모험심과 호기심으로 밤잠을 설치던 젊은 시절이었다. 서울에서 치과기공소를 운영하던 그는 틈나는 대로 출사를 떠났다. 한번은 설악산에서 길도 없는 기암괴석의 루트를 택해 사진을 찍다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1990년 그는 이민을 결행한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어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어요. 서너 시간 가면 끝이지요. 사진인으로서 더 넓은 세계를 향한 동경이 미국으로 향하게 했나 봅니다.”
버지니아에서도 치과기공소를 운영하면서 매주 셰넌도어 국립공원을 찾았다. 초겨울의 들판에서 바람과 햇살을 찍으며 이민자의 외로움도 함께 털어냈다. 하지만 늘 혼자였다. 좋은 사진을 봐줄 이도, 함께 즐길 이도 없었다. 사진에 대한 열정이 삭으러들 무렵 연락이 왔다.
2000년, 새로운 세기는 그에게도 새로운 시작이었다. 10여명이 워싱턴한인사진동우회를 결성했고 서부원정 등 출사를 함께 다니면서 다시 카메라를 잡은 손에 신이 났다.
2008년에는 한국사진작가협회에 지부 요청을 해 꾸준한 활동이 인정을 받았다. 협회에서는 사진강좌를 개설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가르치고 한인 사진 인구의 저변확대에 나섰다. 이 강좌에는 매년 25-30명이 수강해 3기를 배출했다. 사진동우회와 협회의 합동 사진전도 매년 열었다.
돌이켜 보면 세상은 변했다. 그가 사진을 처음 시작한 40년 전에는 사진기가 집안의 보물 1호일 정도로 귀한 시절이었다. 카메라도 디지털화된 지금은 누구나 사진을 쉽게 찍고 접한다.
“필름이 디지털화됐으나 사진의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습니다. 밥을 지을 때 냄비에 하나 가마솥, 압력밥솥에 하나 도구만 바뀔 뿐 쌀로 밥을 짓는 본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맛난 밥을 짓듯 좋은 사진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습니다.”
서대동 작가에게 사진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매개체다. 그는 주로 풍경사진, 그것도 일상의 영역이 아닌 깊숙한 지경의 경치를 담는다. 그 숨겨진 풍경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려 한다. 그는 사진의 힘을 믿는다.
“말과 글이 아니라 사진 한 장에도 사람들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어요. 지난 40년간 내가 쉬지 않고 사진을 찍어온 이유도 바로 사진의 진실을 믿기 때문이죠.”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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