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지금까지 사셨다면 90대 중반이 되셨을 것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아버지는 당시 한국 사람으로는 드물게 영어 일간지, 시사 주간지, 월간지 등을 구독해 읽으셨다.
그 시대 아버지들의 자식 사랑법이 대개 그랬듯이 우리 아버지도 자식에 대한 사랑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으셔서 아버지는 나에게 어렵기만 한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의 자녀교육법이 특이했다. 60년대 중반, 내가 대학에 다닐 때의 어느 날이었다. “그랑프리가 영어로 그랜드 프라이즈지?” 라고 물으셨다. 나는 그랑프리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어봤다. 그래도 아는 척 “아닌 것 같은데요” 라고 얼버무렸고 아버지는 빙그레 미소만 지으셨다.
“이상하다. 영어를 잘 아시는 아버지가 그것을 왜 내게 물으셨을까?” 라는 의문이 생겨 얼른 내 방에 들어가서 사전을 찾아보았다. 그랑프리가 영어로 grand prize라는 것을 확인하고 무안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아버지의 미소 속에는 확인해 보라는 메시지와 딸의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배려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던 나에게 영자 신문을 불쑥 내미시면서 거기에 실린 칼럼을 번역해 보라고 하셨다. 코리아타임스의 한 칼럼이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때 나의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자격지심에 나의 영어 실력을 테스트 하시려는 줄로 생각하고 낑낑대며 번역을 해서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내심 잘했다는 칭찬을 기대했지만 아버지는 그때도 부드러운 미소만 지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단지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번역하라고 하셨을까? 분명 내게 주시고 싶은 메시지가 숨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그 칼럼을 다시 읽어 보았다.
가난한 남자와 결혼해서 궁색한 살림을 하던 여자가 출세한 남편 덕에 여왕처럼 호화롭게 살고 있는 여고 동창생을 찾아가서 돈을 빌리려다 거절당하는 수모,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답은 바로 그것이었다. 여학생 때는 같은 학교라는 울타리와 획일적인 교복 속에서 겉으로 보기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졸업 후에 각자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이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특히 ‘여자 팔자 뒤웅박’이라고 결혼을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여자의 인생행로가 결정 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대학생이 되도록 또래보다 느리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딸에게 그런 여자의 운명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싶으셨으리라.
아버지는 항상 그런 식으로 문제를 먼저 던져 놓고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 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아버지의 미소에서 나는 종종 뭔가 생략 된 듯한 여운을 느꼈고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마치 숨은 그림이라도 찾듯이 곰곰이 생각하고 연구했다.
요즘은 빠른 것이 미덕인 디지털 시대이다. 빨리, 더 빨리!를 외치는 세상이다. 그래서 모든 과정은 무시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 얻기를 원한다. 어떤 부모는 자녀들에게 그냥 넘기기만 하라고 아예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속에까지 넣어주려고 한다. 그러한 부모의 조급증으로 인한 시행착오는 오히려 자녀들의 장래를 망치게 된다.
느리고 부족한 딸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문제를 공들여 풀 수 있도록 기다려주신 아버지! 여운과 메시지가 담긴 아버지의 미소가 오늘따라 무척 그립다.
배광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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