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사람들에겐 햇볕이 귀하다. 우리 집 빨래 날은 바로 햇볕 좋은 날이다. 아내는 빨래거리가 쌓이지 않아도 햇볕이 따가우면 몇 번 입지 않은 멀쩡한 옷과 수건, 침대시트 따위를 빨아서 아파트 베란다에 주렁주렁 넌다. LA에서 집 뒷마당에 널던 버릇이다. 세탁기로 빨아 햇볕에 말리면 보송보송하고 냄새도 신선하다. 아내 말로는 그게 햇볕 냄새다. 시애틀 날씨는 자주 변한다. 지난 일요일도 아침나절엔 화창했는데 오후 늦게 빗방울이 떨어졌다.
교회의 한 할머니신도가 집 마당에 널어둔 빨래가 다 젖겠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여름 낮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 온 식구가 마당으로 뛰쳐나가 빨래를 걷고 장독대 뚜껑을 덮느라 소동을 벌였던 옛날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햇볕은 귀하다. 하지만 아내가 잘 모르는 점이 있다. 우리 아파트에선 베란다에 빨래를 걸 수 없다. 임대 계약서에 ‘빨랫줄(clotheslines)’이나 ‘건조대(drying racks)’를 베란다에서 사용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아내는 베란다 난간과 의자에 너니까 괜찮다지만 빨랫줄을 사용하지 말라는 건 빨래를 널지 말라는 말이다.
아직까지는 아파트 관리실로부터 경고장을 받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만 그런 게 아니다. 시애틀 일원의 거의 모든 아파트가 다 그렇다. 주택 소유주협회가 결성된 콘도와 단독 주택단지에선 베란다와 앞마당은 물론 뒤뜰에도 빨래를 널 수 없다. 시애틀의 한 대형 부동산관리회사는 무려 125개의 주택소유주 협회와 계약을 맺고 콘도와 주택단지를 관리하는 데 한결 같이 빨래를 옥외에 널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주택국 담당자는 시영 아파트가 대부분 고층빌딩이어서 입주자들의 안전을 위해 베란다에 빨래를 못 널게 한다지만 웨스트시애틀의 하이 포인트 같은 단층짜리 서민 아파트 단지에도 이 규정이 적용되고 있다. 기존 아파트뿐 아니라 신축 아파트들도 마찬가지다. 관리회사들은 아파트 주민이 베란다에 빨래를 널다가 추락하거나, 전기 검침원이 집 뒤뜰에 들어가다가 빨랫줄에 목이 감겨 죽을 수도 있다는 등 궁색한 이유를 댄다.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베란다나 뜰에 울긋불긋 널린 빨래들이 아파트와 주택단지 전체의 미관을 해쳐 싸구려로 보이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부동산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민의 ‘빨랫줄 권리’를 보장한 주도 많다. 이웃 오리건을 비롯해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플로리다 등 19개 주정부는 주택 소유주협회들이 빨랫줄 사용을 금할 수 없도록 법으로 명문화하고 있다.
워싱턴주도 이들에 낄 기회가 있었다. 뎁 홀 에디 전 하원의원이 몇 해 전 빨랫줄 사용금지 불법화 안을 제의했는데 주택 소유주협회의 노도같은 로비에 밀려 상정도 못했다. 그녀는 주민전체의 이익을 외면하는 한 이권단체 때문에 입법이 좌절됐다며 주택 소유주협회에 맞설만한 로비단체가 나서지 않는 한 그런 입법은 요원하다고 개탄했다.
건조기(드라이어)는 서북미 가구의 연간 전기사용량 중 평균 4.3%를 독차지한다. 냉장고(3.5%)보다 많다. 햇볕에 빨래를 말리면 가구당 연간 100~300달러를 절약할 수 있고 평균 1,500파운드의 이산화탄소 방출을 줄여 환경보호에도 크게 기여한다. 햇볕에 말리면 건조기로 말릴 때보다 옷이 훨씬 덜 훼손되고 살균효과까지 있어 경제적이고 위생적이다.
아파트 베란다에 빨래를 내걸면 꼭 지저분하게만 보일까? 보는 눈에 따라서는 생동감 있는 건물, 사람 사는 동네, 정감 있는 주택단지로 보일 수도 있다. 아니, 좀 지저분해 보여도 참는 게 좋다. 시애틀에선 비가 찔끔거리거나 구름 끼는 날이 연 평균 227일이나 된다. 햇볕이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더 귀하다. 빨래도 건물의 일조권을 누려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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