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선정 ‘21세기 100대 영화’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요즘 가장 신나는 뉴스로 회자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디지털 구독자가 970만명에 이르는 세계최대의 뉴스미디어이며,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언론이니만큼 이 조사결과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21세기의 진실’이라 해야 할 것이다.
100대 영화는 할리웃과 문화예술계의 리더 500여명에게 “2000년 이후에 나온 가장 좋았던 영화 10편을 꼽으라”고 요청한 설문조사 결과다. 여기에는 우리가 아는 유명 감독과 배우들이 대다수 포함됐는데 한국인으로는 봉준호, 이창동, 셀린 송(‘Past Lives’) 감독과 작가 이민진(‘파친코’), 그리고 한국계 배우 찰스 멜턴(‘메이 디셈버’)이 포함됐다.
100개 리스트는 한 번에 발표된 것이 아니고 닷새에 걸쳐 매일 20편씩 공개되었다. 첫날 6월23일에는 81위부터 100위까지, 24일에는 61위부터 80위까지, 25일에 41위부터 60위까지,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 궁금증을 증폭시키며 발표됐기 때문에 영화 좋아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게임 즐기듯 매일 새로운 리스트를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 기간 동안 독자들도 자신이 선정한 영화를 투표하는 사이트가 개설되었고, 아울러 유명인들이 뽑은 작품들을 보여주는 사이트링크도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가 선정한 영화는 무엇인지 살펴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그때 수많은 사람의 베스트10 필름을 찾아보면서 ‘기생충’이 많이 꼽혔다고 느끼긴 했지만 1위를 차지하리라고는 마지막 1~20위가 발표되던 날까지 예상하지 못했다.
더 놀랬던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 발표된 ‘독자 선정 100대 영화’에서도 ‘기생충’이 1위였다는 사실이다. 무려 20만여명이 투표에 참여했는데 여기서도 최고였다는 사실은 영화계와 평단과 대중을 모두 사로잡았다는 뜻이다. 내노라하는 쟁쟁한 할리웃 영화들을 제쳐두고 한국에서 만든 블랙코미디를 최고라고 뽑았다니, 과연 뉴욕타임스 독자들의 수준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생충’외에 한국영화들로는 ‘올드 보이’(박찬욱, 43위), ‘패스트 라이브스’(셀린 송, 86위), ‘살인의 추억’(봉준호, 99위)이 올랐으며, 독자들의 조사에서는 ‘아가씨’(박찬욱)가 추가되었다.
가장 많은 작품이 리스트에 오른 감독은 크리스토퍼 놀란으로 5개 영화(‘다크 나이트’ ‘메멘토’ ‘인셉션’ ‘오펜하이머’ ‘인터스텔라’)가 선정됐고, 다음으로는 각각 4개작이 뽑힌 폴 토마스 앤더슨(‘피가 있을 것이다’ ‘팬텀 쓰레드’ ‘매스터’ 등). 알폰소 쿠아론(‘칠드런 오브 맨’ ‘로마’ ‘그래비티’ 등), 이산과 조얼 코엔 형제(‘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심각한 남자’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등)가 순위에 들었다.
100대 영화를 체크해보니 절반이 조금 넘는 55개를 보았다. 이 가운데 여러 번 본 것도 있고 다시 또 보고 싶은 것도 있지만, ‘기생충’처럼 열 번도 넘게 본 영화는 없다. 2019년 처음 개봉됐을 때 그 신선하고 짜릿한 충격에 매혹되어서 보고 또 보았다. 특이하고 독창적인 스토리, 끝까지 예측 불가능한 사건 전개, 신랄하고 고약한 블랙유머,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유쾌한 장면들의 완벽한 조화에 두시간 동안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이번에 21세기 영화 1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여 또 한번 보았는데 처음의 감동과 전율이 그대로였다.
‘기생충’은 현재 넷플릭스에 올라있다. 그리고 지금 넷플릭스에서는 봉 감독에 관한 또 한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데, 그가 대학시절 활동했던 영화동아리 ‘노란문’(Yellow Door)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1990년대 초,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모인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조명한 이 다큐에서는 봉 감독이 생전처음 만든 단편애니메이션 ‘룩킹 포 파라다이스’(Looking for paradise)도 볼 수 있고, 화질이 형편없는 VHS 테이프를 돌려보며 영화공부를 했던 세기말 시네필의 공간과 시간도 느껴볼 수 있다.
한편 LA의 아카데미영화박물관에서도 현재 봉준호 감독을 조명하는 특별전(‘Director’s Inspiration: Bong Joon Ho’)이 열리고 있다. 지난 3월 개막해 2027년 1월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봉 감독의 창의적인 영화제작 과정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기획전이다. ‘괴물’ ‘옥자’ ‘설국열차’ ‘살인의 추억’ ‘기생충’ 등의 아카이브자료와 스토리보드, 포스터, 스케치, 모형, 소품, 영상 및 사진들까지, 팬이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흥미로운 자료들을 실컷 볼 수 있다.
그런데 ‘찐 팬’으로서 가장 아끼는 보물은 한국서 출간된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세트’다. 2권으로 된 이 세트는 ‘기생충’ 마니아를 위해 한 친구가 사다준 것인데 더없이 귀한 소장품이 되었다.
한때 만화가를 꿈꾸기도 했다는 봉 감독은 영화의 장면마다 스토리보드를 아주 세밀하게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 영화는 제가 그린 스토리보드와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라고 자랑할 정도여서 한컷 한컷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정교하게 영화를 준비하는지, 얼마나 세밀하게 촬영현장을 컨트롤하는지, 그의 영화가 왜 그처럼 완벽한지를 이해하게 된다.
봉준호의 전성시대는 이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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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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