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이처럼 행복하고 뿌듯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늘 클래식음악 현장에서 어른거렸지만, 대체로 언제나 ‘그들의’ 공연이었다. 하지만 지난 한 주는 완전히 달랐다. 6월 3~10일 LA필하모닉 주최로 열린 ‘서울 페스티벌’은 우리의 음악, 우리의 축제였다.
제목은 ‘서울 페스티벌’이지만 50여명의 출연자 중 서울에서 활동하는 음악인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미국과 유럽을 베이스로 세계무대에서 활약 중인 신예들, 모두 음악교육과 각종 콩쿠르 및 레지던시, 무대 경력이 대단히 화려한 영재들 한사람 한사람의 이력을 살펴보며 놀라움과 자랑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과거에 우리는 ‘한국을 빛낸’ 세계적 연주자 하면 한동일 정경화 정명훈 백건우를 이야기했고, 최근 들어서는 조성진 임윤찬, 조금 더 나아가 김은선 김선욱 손열음 정도를 떠올린다. 하지만 요즘엔 이런 선배들을 훌쩍 뛰어넘는 경이로운 연주자 지휘자 작곡가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다. 음악적 역량에 제약과 한계가 없고, 재능을 무한대로 펼쳐나가는 젊은이들이다.
해외 이민자들은 한국이 그동안 안팍으로 얼마나 달라지고 발전했는지 사실은 잘 체감하지 못한다. 이 페스티벌을 통해 우리는 세계가 한국에 열광하는 것이 K팝이나 드라마, 영화만이 아니라 클래식음악도 얼마나 괄목할만한 도약을 이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이 축제를 기획한 한국 현대음악의 대모, 진은숙 작곡가의 의도였다. 한국 젊은 음악가들의 소리, 그 실력과 잠재력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서울 페스티벌에 대해 뉴욕타임스, LA타임스, 샌프란시스코 클래시컬 보이스 등이 자세히 소개했는데 모두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지형학적으로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있는 이 작은 나라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천재음악가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로 추측되었는데, 자원부족의 한반도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은 사람이라 그 재능과 지력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는 것, 우리는 원래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끼가 넘치는 민족이라는 것, 그리고 이 문화민족의 예술성과 독창성을 이제야 세계가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울 페스티벌의 4개 프로그램에 모두 참석할 수 있었다. 모든 공연이 대성공이었고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현대음악과 고전음악, 실내악과 관현악, 독주 협주곡과 더블 콘체르토 등 다양한 형식의 음악들이 고루 있었고, LA필이 위촉한 신작의 세계초연이 6곡이나 되었다. 큐레이터 진은숙의 작품도 2개 미서부 초연돼 갈채 받았다.
새로 지은 음악이 무대에서 처음 연주되고, 이의 최초의 청중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특별한 경험이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첨단음표들이 다채롭고 기이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동안, 언제 어디서 어떤 소리가 튀어나올지 몰라 흥분과 기대로 귀를 여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중에는 오케스트라의 뒷부분을 가득 점령한 수많은 타악기들이 주인공이고, 현과 관은 거의 엑스트라 수준인 작품들도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음악의 ‘세련됨’이었다. 현대음악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지만 모든 음악이 좋은 것은 아니다. 어설픈 것도 있고, 너무 아방가르드 해서 듣기 힘든 것도 있고, 특이한 기법의 남발로 본질이 흐려진 음악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번 페스티벌에서 소개된 한국의 컨템포러리 뮤직은 도대체 나무랄 데가 하나도 없었다. 질적으로 두툼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다. 작곡, 지휘, 연주가 모두 일관되게 세련되었다.
많은 동양계 작곡가들은 자국의 음악적 요소를 서양 음악체계에 접목시킬 때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을 해소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국의 젊은 작곡가들은 그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스토리를 유니버설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국의 현대음악이 여기까지 온 것은 진정 놀랍고 자랑스런 일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모든 연주자들이 보여준 자신감이었다. 어느 누구도 떨거나 긴장하지 않고 마음껏 역량을 피워내며 무대를 즐기고 있었다. 특히 지휘자 최수열과 윤한결은 이번 페스티벌의 스타였다. 두 사람 모두 박진감 넘치면서도 샤프하고 섬세한 지휘로 개성 있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현대음악 초연은 쉽지 않은데 얼마나 자신감 넘치는 바톤 테크닉으로 오케스트라를 리드하며 음악을 만들어 가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작곡가 서주리, 이규림, 김택수, 이안환, 이성현의 곡들이 좋았고, 연주자들은 최희연(피아노), 김유빈(플루트), 홍유(대금), 김 한(클라리넷), 한재민(첼로)이 눈에 띄었다. 이 가운데 ‘무서운 신동’으로 불리는 19세의 첼리스트 한재민은 듣던 대로 놀라웠다. 브람스의 더블 콘체르토에서 양인모와 함께 독주자로 나선 그는 첫 소절부터 연주홀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거친 호흡으로 활을 그어대는 그의 신들린 듯한 연주는 ‘비르투오소’ 양인모의 바이올린을 압도할 정도로 강렬했다. 세상에, 바이올린 이기는 첼로를 처음 봤다.
너무 좋은 음악이 많았는데 지면상 하나하나 소개하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다. K클래식이 앞으로 얼마나 더 풍성해질지,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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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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