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뭔가 달라져간다. 평소 말이 없고 무덤덤하던 남편이 언제부터인가 달라지고 있다. 집안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더니 최근에는 아예 주방을 차지하다시피하고 요리사가 됐다.
매일은 아니지만 아침에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내게 모닝커피를 끓여 대령하는가 하면 점심때는 파스타도 만들고 저녁때는 샐러드도 만든다. 작은 노트에 상당량의 조리법을 수집해 놓고 그것도 모자라 잡지에서 관심 있는 요리 만드는 법을 열심히 메모해둔다. 그리고는 아는 요리 모르는 요리 가리지 않고 자주 해놓고는 내 반응을 떠 본다.
나야 남편이 해주는 요리니 감격해서 맛있게 먹고 칭찬을 늘어놓는다. 남편은 거기서 보람을 찾는 듯하다.
남편이 왜 요리사로 변신했을까? 평소의 남편답지 않게 왜 그런 맘을 먹게 됐을까? 아마 지난 세월 내게 진 빚이 많아 그 빚을 갚으려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슬쩍 그런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쑥스러운지 천만의 말씀이란다. 다만 취미일 뿐이란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남편은 젊어서부터 방송기자로 출발해서 은퇴하기까지 30여년 방송에만 종사했다. 그러다 보니 결혼 초부터 분초를 다투는 뉴스를 다루느라, 그리고 점점 짐이 무거운 자리로 옮겨가면서 그 책임을 다하느라 가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야말로 별 보고 출근해서 별 보고 퇴근하는 일과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초저녁에 들어오는 남편을 보고는 ‘회사에서 잘렸나?’ 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적도 있었다. 어찌됐건 남편이 그렇게 직장에 매달리는 동안 맏며느리인 나는 시부모와 두 아들, 두 시누이와 시동생 그리고 외국에 나가 사는 큰 시누이가 맡긴 조카딸까지 함께 한 대식구들 틈에서 부대끼며 살았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이 지방근무로 몇 년씩 집을 비울 때는 어린 아이들을 끌고 서울과 지방을 오르내려야했고, 남편이 반짝 LA에서 몇 년 근무 후 서울로 돌아갔을 때는 혼자 낯선 이국땅에서 무거운 짐을 몽땅 지고 눈물 콧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남편이 은퇴를 했다.
남편은 이제 서울과 LA를 일 년에 절반씩 오가며 산다. 서울에는 100세가 내일 모레인 노모가 사시고 LA에는 나와 두 아들이 산다. 남편은 은퇴하고 나서야 가족, 특히 내가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집에 돌아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던 사람이 지금은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집안일은 뭐든지 한다. 젊어서 진 빚을 그런 식으로 갚는 것 같다.
얼마 전 65년 이상을 해로하다가 같은 날 세상을 뜬 노부부의 얘기가 화제가 됐었다. 그 남편은 부인의 헌신적인 사랑에 빚진 게 많다고 했다지만, 그 자녀들은 아버지도 어머니에게 헌신적이었으니 어머니에게 빚진 게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부부가 자기의 입장에서 서로에게 헌신했다면 무슨 빚이 따로 있겠는가. 우리 부부도 앞날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서로 빚진 게 없다고 확인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남편이 내게 빚이 있다고 생각하건 말건, 맛있는 요리나 자주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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