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를 물에 은근히 우려 국물을 낸다. 멸치국물이 충분히 끓었을 때 계란을 풀어 넣고 거품을 걷어낸다. 마늘 한쪽을 다져 넣고 슴슴한 국 간장으로 간 해둔다. 삶아놓은 찰진 국수를 잘 말아놓고, 송송 다진 김치에 참기름과 깨를 넣어 조물조물 무쳐 고명을 준비한다. 국수를 우묵한 그릇에 담고 뜨거운 국물을 붓는다. 위에 김치고명을 넉넉히 올리면 뜨끈하게 속을 감싸는 잔치국수가 완성된다.”
지난 주말 집에 혼자 있던 나는 이 국수를 만들어먹으며 과정 과정을 속으로, 한국말로 차근차근 되새겼다.
이상하기도 하지, 내 모국어로 만들어내는 말들은 그 말 속에 향기가 있고 맛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동안 잊고 지낸 친구를 다시 만나 까마득하게 잊었던 옛날 사건들까지 떠올리며 수다를 떨 때의 그 짜릿하고 흥분되는 기분처럼 말이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영어를 더 빨리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국 책을 멀리 했었다. 영어로 된 책들을 일부러 사다놓고 읽고, 덮었다 읽고, 포기하기도 하고…
특별히 학위 과정을 이수하지도 않으면서 생활 속에서 영어를 익히려니 힘든 게 사실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즐겨 읽는 미국 저자의 책도 생겼고 읽는 동안 빨려 들어가기도 하지만, 한국 책을 읽을 때의 온몸 구석구석 세포가 일어나는 느낌과는 확실히 비교된다.
지난여름 한국을 다녀오면서 가져왔던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를 읽는 동안 내내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가슴이 뛰는 걸 느낄 수 있었고, 내가 마치 지리산 한 자락에 놀러가 당장이라도 그 어딘가에 앉아 수다 떨고 싶은 기분이었다.
카피라이터였다가 여행 작가가 된 선배 이화자씨의 ‘여행에 미치다’를 읽는 동안엔 함께 전 세계를 여행 다니며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나도 만나고, 한국말로 그 여행 이야기를 토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나누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상하게도 한국말로 된 책을 읽으면, 어릴 적 기억들도 함께 떠오르곤 한다. 혼자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하던 국어숙제. 동아전과를 펴들고 반대말, 비슷한 말을 찾아보며 쓰던 날들. 글짓기 숙제를 하느라 창문을 올려다보며 뒷집의 나무에 돋아난 초록의 잎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억. 책상에 앉아 있다가 라디오에서 내가 듣고 싶던 음악이 나오면 녹음방지 부분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여놓은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서둘러 빨간색 녹음버튼을 누르던 그 밤들. 공부대신 편지지를 빼곡히 메우며 써내려가던 그 얘기들. 그 시간들이 동시에 와르르 어딘가에서 쏟아져 나와 내가 읽고 있는 책 주변에 함께 자리 잡고 앉아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알게 된 팟캐스트의 몇 채널들은 이런 갈증에 더욱 불을 붙이게 되었는데,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이동진 기자의 빨간 책방, 문학동네 문학이야기는 십년이 넘는 시간을 뚝 떼어 모국어에 갈증 난 나에게 시원한 물줄기를 쏘아주는 것 같다.
소설과 시의 장르를 오가며 모국어의 향연에 젖어 있다 보면 말이 주는 그 위대한 치유력, 글이 주는 놀라운 상상력에 침을 꼴깍 삼키며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기분에 빠져든다. 모국어, 내 영원한 그리움의 뿌리. 영어를 더 잘할 수도 없고, 더 잘하기 위해 용을 쓰지도 못하는 나의 어쩔 수 없는 변명이자 또 이국의 생활을 견디게 하고 잘 살아내게 하는 내 마음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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