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인 이민사 산증인’ 박영창 목사 타계- 청년시절 부친과 일본서 신사참배 반대 등 항일운동 1969년 도미, LA서 대한남가주교회 설립 20년간 담임
▶ 80년대·2000년대 일본 건너가 교과서 왜곡 항의 활동, 박정애 사모 별세 2주 만에 뒤따라 안타까움 더해
지난해 월광 박영창 목사의 백수연 및 결혼 75주년 축하연에서 박 목사가 박정애 사모와 함께 자녀들의 축하를 받으며 케익 커팅을 하는 모습(위). 박영창 목사의 결혼식 사진. 뒷줄 맨 왼쪽이 부친 박관준씨, 오른쪽으로 두 사람 건너가 어머니.
2011년 박영창 목사가 독립운동을 펼치다 옥사한 부친 박관준 장로의 초상화 앞에서 항일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28일 별세한 박영창(100) 목사는 미주 한인 기독교계 최고 어른이자 독립운동가로 헌신한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아버지 박관준 장로와 함께 항일투사의 삶을 살았고 8·15 해방 후 미국으로 건너 와서는 개척자적 삶을 실현한 한인 이민역사 한 세기의 산증인이자 한인사회 버팀목이었다.
미국에 뿌리를 내려 46년을 살면서도 일제에 항거하다 순교한 아버지 박관준 장로의 고귀한 뜻을 간직했던 박 목사는 한·일 간의 올바른 관계정립, 그리고 동아시아 미래와 세계평화를 위한 활동에 앞장서 왔다.
한·일관계의 올바른 과거사 인식이 동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으로 판단해 일본이 과거사의 올바른 청산을 통해 아시아에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이 정착되도록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들에게 역사를 직시하는 용기를 가지고 솔선하여 나서라고 촉구해 왔다.
▲순교자 박관준 장로의 아들
박영창 목사는 1915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의사 박관준·이관선씨 부부 슬하에서 태어났다. 박 목사의 아호는 ‘월광’인데 이는 어머니의 태몽 속 음성 “네 아들은 장차 동반구의 무쇠기둥이 되리라’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박영창 목사의 회고록 ‘일본이여, 대답하라’에 따르면 꿈에 나온 동반구의 무쇠기둥은 박 목사 자신이 아니라 조국, 즉 한국을 의미한다. 그만큼 박 목사는 조국을 자기 자신보다 우선했고 이는 독립운동사에 순교자로 기록된 아버지 박관준 장로의 뜻이기도 했다.
박 목사의 청년시절은 1939년 신사참배 반대 항의 경고문 투척사건 전후로 나뉜다. 박 목사는 당시 25세로 도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도쿄 YMCA 협동총무로 재직 중이었다.
결혼식을 한 달 앞둔 예비신랑이었지만 당시 아버지의 거사계획 동참 권유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독교 자유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고 한다.
1939년 3월24일 일본제국 의사당에서 중의원 제74회 회의가 열렸다. 모든 신민의 신사참배 의무화를 공식화하는 ‘신 종교법안’을 처리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회의장에는 500명의 중의원과 내각 각료, 해외 대사들로 꽉 들어찼다. 일본 제국의회의 고야마 의장이 입장하고 개회 선언을 알리자마자 박관준·박영창 부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리 준비한 경고문을 회의장 중앙을 향해 뿌렸다. 삽시간에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이들 부자와 안이숙(당시 보성여학교 음악교사)씨가 일경에 체포돼 도쿄 경시청에 수감됐다. 거사 후 결사대는 조선으로 압송됐다.
▲내조자 박정애 사모의 만남
박영창 목사는 조선으로 강제 압송된 후 가택연금을 당했고 일제의 감시 눈초리가 주춤해진 사이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안주읍 동교회를 담임한 한승곤 목사의 주례로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 하에 결혼식이 진행됐다. 바로 박 목사보다 2주 먼저 세상을 떠난 고 박정애(이정애) 사모와의 백년가약이었다.
결혼식을 끝내고 박 목사는 중국 망명을 감행했고 북경으로 찾아온 아내와 6년간의 중국생활을 시작했다. 1944년 장남(박영남 목사)이 태어났고 이듬해인 1945년 3월 아버지 박관준 장로의 옥중 순교소식을 접했다.
그렇게 8·15 해방이 찾아왔고 1946년 가을 자유 조국의 품에 안긴 박 목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였던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그대는 광야의 눈길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걸어가지 말라.
왜냐하면 그대가 먼저 걸어간 발자국을 뒷사람들이 그대로 밟고 따라갈 터이니 똑바로 걸어가라”는 내용의 한문시와 “그대가 홀로 있을 때 삼가 근신하라”는 휘호를 받게 된다. 박 목사는 생전에 김구 선생이 써주신 이 휘호를 바라보며 새로운 힘을 얻을 때가 많다고 밝혔다.
박 목사는 1948년 김구 선생을 지도고문으로 각 대학 대표로 결성된 ‘면학동지회’의 초대회장이 되었다. 한국 학생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면학동지회에는 이휘호 여사, 강영훈 전 국무총리, 이동원 전 외무장관 등이 활동했다.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 오다
1969년 도미한 박영창 목사는 LA에서 대한남가주교회를 설립, 20년간 담임했으며 교육계, 언론계, 사회단체, 기독교계의 단체들에서 회장 또는 고문을 지내며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이북 5도민 연합회를 창시, 초대회장을 지냈고 한국 5도청과 연계해 모국 방문단을 LA 최초로 파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 평생 명예회장으로 추대돼 봉사했다.
1982년 일본 정부의 교과서 왜곡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 및 사회 각층에 항의 경고활동을 펼쳤다. 당시 일본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박 목사가 발표한 ‘일본이여, 들어라!’라는 자작 일본 규탄시는 일본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 다나카 마키코 일본 외상과 일본 국회 중의원 도이 류이치 외무위원장, 도이 다나코 일본 중의원 의장 등을 직접 만나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두 번째 일본의 역사 교사서 왜곡이 이슈화 된 2001년에도 박 목사는 즉시 일본 도쿄로 가서 일본 신정 교과서 왜곡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박 목사는 아버지 박관준 장로와 함께 케네디 대통령이 제정한 세계평화봉사단으로부터 ‘세계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들 부자의 헌신적인 조국 사랑과 목숨을 건 독립운동 활동은 후대에 널리 인정 받았으며 20년 간 LA 시장을 역임하고 타계한 탐 브래들리 전 시장은 박 목사에게 “부친은 한국의 마틴 루터 킹이다”는 말을 남겼다.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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