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정체(政體)가 가장 좋은 것 인지는 말하기 쉽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정치 체제라 하더라도 그 운영의 묘나 방법, 또 그 체제가 이루어진 역사적 전통이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은 같은 뿌리를 나눈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방법이나, 권력의 집중과 균형을 유지하는 제도의 효율성에 대한 견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세계 정치사를 살펴보면, 약간의 예외를 감안해도, 확실한 정치발전의 흐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전제적 (專制的)인 정부로부터 민주적 (民主的)인 정부로, 구속(拘速)과 억압(抑壓)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바로 그것이다. 소수 엘리트들의 정치적 전횡(專橫)으로부터 다수 민중에 의한 민주정치(民主政治)로 변화해 온 것이 인류 정치 발전사의 요체인 셈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정치체제 중에서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정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의견은 물론 일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지구상에 현존하는 정부 중 가장 폭압적 이고 일인 독재의 전횡이 극심한 북한의 국호조차 ‘조선민주주의 공화국’ 운운 하는 것을 보면서, 역설적이나마 모든 인류가 아직도 지향하는 정체는 민주주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지난 반세기 한국의 역사는 권위적인 개발독재로부터 보다 자유로운 민주사회를 이루기 위한 투쟁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개발독재의 비전이 비록 위대하다고 하더라도, 자유로운 민주사회에서 우리 민족은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독재정부에 저항 하여 마침내 오늘의 민주정부를 이루게 한 힘 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는 오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원칙 보다는 일시적 방편이 앞서고 합리적인 토론으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보다는 정권을 잡기 위한 감정적 호소가 판을 치는, ‘포퓰리스트’의 ‘이미지 정치’ ‘이벤트 정치’ ‘감성 정치’ ‘충동정치 (衝動政治)’의 결과 때문이다. 지나간 노무현 정권이나 베네수엘라의 모두로(Moduro) 정권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 충동정치는 예부터 민주주의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부패한 정치 체제의 유형으로, 전제정치, 과두정치와 함께 민주 정치를 꼽았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에 내재한 약점을 정권유지를 위해 감정에 호소, 선동적으로 편을 가르는 지도자와, 이성적인 판단 없이 감정에 휩쓸려 이들에게 이용당하는 민중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두 독소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른바 중우(衆愚) 정치에 대한 경고였다.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지적한 것 같아 오싹한 느낌이 든다. 물론 완전한 민주정치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완전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정체로 선택한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이 체제가 어떻게 유지, 운용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가 분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처럼 고학력자가 넘치는 사회에 누가 보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중우정치의 혼란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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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헌 (맨체스터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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