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릴의 오피스는 햇볕이 잘 드는 이층창문을 끼고 있다. 창밖에 커다란 전나무 가지 하나가 금방이라고 창문을 두드리며 춤이라도 추자는 듯 흔들거리면 나는 셔일에게 “너는 참 행운아야, 언제나 밝은 햇살이 너와 함께 있고 나뭇가지는 너와 춤을 추자고 하니 말이야” 하면 “그렇네, 정말 그런 것같은데...” 하며 투실투실한 얼굴에 웃음이 넘친다.
항상 밝은 얼굴의 셔릴은, 22살난 딸과 21살 된 아들이 있단다. 아들은 셔릴을 닮아 성격이 좋은 가 본데 딸은 그렇치가 않은 모양이다.
“걱정마, 딸은 언제나 엄마 편이거든, 언젠가는 네 편이 되어 있을거야.”“그렇겠지? 나도 그럴 거라고 믿어.”
창밖은 이른 봄, 따스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애리조나에서 막내아들과 지내던, 내년이면 백세가 되시는 장모님이 뉴저지로 다시 오시게 된 건 지난 12월 중순이었다. 50대 후반이라고 은퇴를 강요받고 미국으로 돌아온 막내아들과 남은 여생을 보내려던 장모님의 꿈은 2년만에 깨어졌다.
그 아들이 다시 한국에 직장이 되어 나가게 되었고 며느리마저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하는 수 없이 뉴저지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파립이 다 되어가는 어느 자식도 모실 형편이 못되어 결국 양로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평생을 단 하루도 자식 곁을 떠나본 적이 없는 장모님을, 양로원에 혼자 내버려 두는 게 너무 안스러워, 나머지는 내 몫으로 마음먹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어찌되었든, 겨울이 다 가는 이른 봄에 불어 닥친 차가운 바람이었다.
나의 아버님은 15살에 이북에서 서울로 와 일본사람만 다닌다는 학교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고학으로 다니셨다고 했다. 조부모님이 보고 싶을 땐,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저 달을 쳐다볼 조부모님을 생각했다면서 주자의 한시를 들려주셨다.
수욕정이 풍부지(樹欲靜而 風不止)
자욕양이 친부대 (子欲養而이 親不待)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은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려 하나 부모는 기다리지 아니하는구나.”
누구에게나 바람은 분다. 그것이 따스한 바람이기도 하고, 한겨울의 삭풍 같은 차가운 바람이기도 하고 우리의 가슴을 에이는 사무침의 바람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 아버님이 들려주시던 한시는 먼 훗날 내가 다시 읊조려야 할 한시였음을 깨닫게 해준 건 언젠가 우리들을 흔들고 떠나가버린 세월이란 바람이었다.
<
주동천 / 뉴저지 노스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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