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근처 반 블럭 거리에 큰 나무가 하나 있다. 아마도 참나무과에 속한 듯하다. 흠없이 잘 자란 나무다. 둘레가 어림잡아 두 아름인 것으로 보아 3m, 50cm 정도 되고 높이는 100~150 ft (35-50m) 정도다.
뉴욕에 오래된 가로수가 많지만 그렇게 큰 나무는 정말 보기 힘든다. 대개 100~200여년인데 이 나무는 600~800여년은 된 듯하다. 오래 전 요세미티 공원에서 보았던 1000년 넘은 것을 본 후로는 처음이다. 자주 산보하며 접하는 이 나무는 늘 마음에 위로를 준다. 큰 나무처럼 사람도 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기쁨 그리고 꿈을 준다.
장기려 박사나 이일선 목사 같은 분들은 의사로써 우리에게 푸른 꿈을 주었다. 이일선 목사는 내가 나온 한국 신학대학 선배로 본인이 군 졸병 시절 많은 위로의 편지를 보내준 분이다. 그가 울릉도에 처음 갔을 때 주민들이 집에 돌팔매질을 하며 국회의원이 되려고 그 곳에 왔다고 핍박을 했단다.
집 유리창이 다 부서지는 그런 수모를 다 이기고 그가 그곳에서 한센병(문둥병)자들을 일생동안 돌본 것은 큰 나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삶이다. 나는 큰 사람 문익환 목사를 대학 3학년 때 만났다. 그가 강의 중에 남북문제를 말하며 눈에 이슬이 맺혔었다.
시인이(성경 시편 번역)며 학자요 목사인 그가 갑자기 정치인이 된 것은 그의 친구 사상계 사장인 장준하가 죽임을 당한 후였다. 그는 윤동주와 함께 세 사람이 친한 친구 사이로 같은 고향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는 일제하에 시인 윤동주를 잃고 이후 장준하마저 잃어버리자 군사독재에 항거 하며 수없이 감옥 생활을 하였다.
문익환 목사는 폐병을 앓고 있던 몸이어서 늘 안타까웠다. 그의 눈에 맺힌 이슬을 본 후 나도 반 쪽짜리이지만 애국자가 되었다. 그 증거로 43년 전 CA 샌디에고에 유학이랍시고 왔을 때 TV 가 필요했다. 수퍼에 들렀는데 지금은 한국산이 미국에서 판을 치고 있지만 그때는 어림없었다. TV 섹션에 진열된 것들을 보니 일제 칼라들과 한국산은 흑백 13인치가 진열 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도 귀한 일제 칼라 23인치 TV를 사들고 나오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흑백 금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매니저에게 달려가 잘못 샀다고 바꾸어 달라고 하여 우리 것 금성을 들고 나온 나는 반쪽짜리 애국자가 되었다.
그때 13인치 흑백TV를 사오면서 느끼는 뿌듯함은 애국자가 아니면 결코 맛볼 수 없으리라. 큰 나무는 늘 우리에게 든든함을 선사 한다. 큰나무 같은 아니 큰 사람이 되기를 기원 하자. 누구든 큰 나무가 될 수 있다. 만일 우리 삶에 나라와 민족 작게는 남을 위한 적은 배려까지 하다가 눈에 이슬이 맺힌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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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홍/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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