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을 오래 전에 읽은 듯한데, 사실은 어떤 기억의 편린(片鱗)인지, 잘 모르겠다. 메모 노트 한 구석에 작은 글씨로 적혀있어 오랜만에 보았는데 가슴에 닿았다.
- 남극을 탐험할 때는 썰매를 끄는 개들이 필수다. 그러나 그 탐험이 끝난 후 남겨질 개에 대한 처리가 동서양이 다르다. 영국 탐험대는 돌아가면서 그 개들을 전부 사살한다. 그러나 일본 탐험대는 그 개들과 작별하면서 가슴이 아파 죽이지를 못한다. 오래오래 잘 살라는 당부와 함께 눈물을 뿌리며 개들을 설원(雪原)에 남겨두고 떠난다.
영국 탐험대는 말한다. “지금 당장 개를 죽이고 떠난다는 게 마음 아프지만 그래서 눈물 몇 방울 흘리며 그냥 남겨 두고 떠난다면 이후에 벌어질 상황을 생각해 보았는가.”
개들은 생존을 위해 자기들끼리 엄청난 투쟁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물고 뜯고 하다가 얼어 죽고 마침내는 서로 잡아먹는 비극이 발생한다. 그렇게 놔두고 떠나기 보다는 당장은 슬프지만 깨끗하게 뒷처리를 하고 떠나는 것이 개를 사랑하는 진정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작별의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작별할 때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래전 성직자로 있었던 지인이 있었다. 친구라고 부르기엔 조금은 멀고 지인이라고 하기엔 조금 더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래도 그냥 “아는 사이” 로 놔두는 게 마음이 편하다. 그는 한 15년 쯤 성직자로 봉직하다가 갑자기 그 직을 내려놓았다. 우리들에게는 “갑자기”지만 당사자에겐 갑자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성직을 사임하고 한국으로 나가 작은 출판사에 취직하면서 인생을 새로 시작했다. 성직은 미국에서의 직업이었기에 한국으로 나간 후 그는 성직 자체를 감춰버렸다. 그는 모든 연락처를 끊었다.
그는 자신의 전환을 누구에게도 떠벌리지 않았고 극히 소수의 몇 사람에게만 얘기했으나 그조차도 귀국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그가 떠나면서 내 이멜에 몇 자 적어 논 작별의 서(書)가 마지막 소통이었다. 그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애를 썼고 그 작별의 메시지는 그것만으로 종결되었다.
“나는 이제 서울로 갑니다. 현실적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려니 짐작하지는 마세요. 나는 미국과의 절연을 위해 떠나는 게 아니라 나로부터 작별하기 위해 Delta를 타고 갑니다. ”
이게 그의 마지막 편지였고 나는 그날부터 며칠을 번뇌했다.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참으로 아픈 일이다. 그중에도 자기 자신과의 작별처럼 괴로운 작별이 어디 있을까.
어쩌면 그 지인은 편지를 쓰느냐 마느냐를 두고 잠시라도 고민했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내게 글을 남기지 않았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침묵이 더 좋았을지, 아니면 그저 “굿바이”라고만 적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영국 탐험대가 개들과의 작별에서 택했던 그 비정한 사랑을 보면서 순간 미국을 버리고 간 지인을 떠올린 것이다.
그 후 몇 번 서울에 갔을 때 지인을 수소문 하는 척은 했으나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공연히 그의 작별을 퇴색시키는 느낌이 있어서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떤 출판사에 다닌다는 소문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 역시 확인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작별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KAL이 아닌 델타를 타고 서울에 간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정말 때로는 계절과 상관없이 내 안에서 나를 떠나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돌아보면 내가 경험했던 성취보다 실패가 훨씬 더 많았고, 그래서 문득 발견하는 내 어리석음들을 목격했을 때, 그 때가 여름이든 겨울이든 상관없이 나는 작별을 연습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늘 사춘기를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사는 것 같다. 확실한 작별을 눈앞에 두고서도 작별이란 단어에 몰입하는 미숙아처럼. 변변한 인사도 없이 헤어진 작별은 끝내 작별이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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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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