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화초에 물주는 것을 잊었었다. 그래서 2주 만에 물을 주려고 접한 식물들의 잎은 어느새 낙엽으로 바닥에 쌓여있다. 메마른 흙속에서 생존하느라 여인초의 큰 잎들이 엉성하게 엉켜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꽃,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어, 존재의 의미가 된 꽃”이라며, 김춘수시인의 시를 합창했던 부겐베리아의 붉은꽃 뭉치들도 이젠 아쉽게 우수수 떨어져있다.
비온 뒤에 멀리 보이는 그리피스 팍의 계곡 사이로, 안개의 무리가 멈칫거리며 지나간다. 목이 마른 내 화초들도 안개의 경로를 따라가며 향기를 맡고 싶겠지.
가을은 언재나 맑고 고요하게 다가와, 어느 날 불현 듯 내 생활 위로 군임 한다. 햇살은 한결 부드러워지고, 바람은 맑고 투명해진다. 나무들은 조용히 자신의 겉옷을 벗으며 마지막 결실을 준비한다. 노랗게 마른 잎들은 바람 속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듯 살랑거리다 머뭇거리며 땅위로 내려앉는다. 가을은 버림의 계절이 아니라 익음의 계절이다. 잎이 떨어질수록 생은 본질에 가까워진다.
그 잎들은 한 생의 마지막 말을 준비하는 인간의 숨결과도 같다. 오랜 세월 햇살을 품고 비를 견디며 살아온 나뭇잎이, 이별의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자신을 밝힌다. 성찰과 그리움, 아름다운 소멸의 계절, 살았던 삶의 갖가지 추억을 잎 속에 아로새기고, 의심 없이 부드러운 흙 속에 몸을 섞는 자연의 순환을 보게 된다. 잎이 떨어질수록 본질적으로 비움, 겸허, 감사로 완성되는 내적 성숙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과정도 자연처럼, 나이가 들수록 말은 짧아지고, 마음의 결은 부드러워진다. 그것은 잎이 지듯 욕망이 사라지고, 오히려 진실만이 고요히 남게 되는 삶의 과정이다.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순간이 생의 도정이라면, 땅에 눕는 그 소리는 기도일 것이다. 생명의 향기 같은 기도일 것이다.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 굽이치는 바다와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 낙엽이 지는 순간의 고요 속에서 그는 자신을 비우고 신 앞에 선 한 인간의 겸허함을 노래했다.
젊음의 계절에는 세상을 품으려 애쓰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는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며 가벼워진다. 욕망을 버려야 비로소 내면의 소리가 들리고, 고요 속에서 자신과 마주할 수 있다. 참된 성숙이란 결국 비워야 채워지는 마음의 질서이며, 가을이 우리에게 남긴 고요한 지혜인 것 같다. 성숙과 결실, 수확의 계절. 겸허로 향하는 계절이 바로 다가왔다.
<
김인자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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