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테러범을 비호하는 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부시 대통령은 전쟁이 오래 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지만 미국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상당기간 정치적 책임을 떠맡아야 할 것이라는 점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선례인 19세기의 해적 소탕이 참고가 될 것이다. 테러 비호국가를 서방이 관리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 수 있다. 해적과의 전쟁을 처음 선포한 나라는 아직 건국한 지 얼마 안 되는 미국이었다. 18세기 말엽 알지에와 튀니스, 트리폴리의 지배자들은 해적들을 비호하거나 스스로 해적질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유럽 각국들은 이들과 전쟁을 하기보다는 몸값을 주고 잡혀간 선원들을 돌려 받는 쪽을 택했다. 영국의 넬슨 제독은 이들에 대한 보복 금지명령을 받고 "피가 끓는다"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미국은 달랐다. 연방 의회가 1794년 해군 창설을 승인한 주 이유도 해적 소탕이었다. 1805년 미 해병은 이집트에서 사막을 건너 트리폴리의 지배자로 하여금 잡아간 미국 선원을 모두 풀어주고 평화협정을 맺도록 강요했다. 지금도 해병 군가에 "몽테주마의 전당에서 트리폴리 해변까지"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1815년 미국은 바바리 국가로 불리던 이 세 나라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뒤이어 영국도 사상 최대 규모의 포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승전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이들 세 나라는 미 군함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해적질을 시작했다.
이들의 버릇을 단단히 가르친 것은 프랑스였다.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아 전체를 점령, 100만명의 자국민을 이주시키며 식민지로 삼았다. 튀니지아와 모로코를 보호국으로 만들어 이곳의 해적 문제도 해결했다. 이탈리아도 트리폴리의 지배자를 없애고 리비아라는 나라를 만들었다.
북아프리카의 식민지 해방은 피로 물든 사건이었다. 프랑스가 120년간 지배해온 알제리아에서 물러나는 데는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해야 했다. 리비아에서 가다피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국민들이 이탈리아인의 학정에 진절머리를 냈기 때문이다.
19세기에도 유럽 열강은 아랍국가를 끌어들여 반 해적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했다. 영국은 주변국들로부터 해적 소탕에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칼로 뒷받침되지 않는 약속은 무용지물"이라는 교훈만 얻었을 뿐이다. 영국이 아덴을 비롯, 페르시아만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은 일시적으로라도 테러 지원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것뿐 아니라 통치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 대상은 아프가니스탄만이 아니라 이라크, 수단, 리비아, 이란, 시리아를 포함하게 될 것이다. 국제법을 준수하는 민주 정권이 들어서는 곳도 있겠지만 서방의 통치가 불가피한 곳도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 최선의 방책은 신탁통치제를 부활하는 것이다.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지 못하고 테러를 자행하는 나라들은 완전한 독립을 보장받을 수 없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모두 미국 입장을 지지하는 지금 테러 지원국을 신탁통치 대상국으로 지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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