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해 초여름 차범근 울린 히딩크, 지난 늦가을 차두리 뽑아 호랑이로 키워가고...
차범근-차두리-히딩크. 피로 얽히고 축구로 설킨 세 남자의 인연이 유난히 질기다.
아시아가 낳은 역대최고 축구스타 차범근과 태극사단 공격라인의 새 희망으로 떠오르는 차두리가 부자관계임은 주지의 사실. 아버지가 분데스리가(독일 프로리그)에서 한창 ‘차붐’ 선풍을 일으키던 시절 세상빛을 본 스물한살 청년 차두리는 지난해 11월 아프리카 세네갈과의 평가전을 앞두고 국가대표에 전격 발탁됐다. 경신고 재학시절 전국구스타가 돼 19세때 태극마크를 단 아버지에 비해 1년여 늦은 데뷔였다.
이를 ‘앞차의 빽’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 혈통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에서 체계적인 새싹훈련을 받은 차Jr.는 고교(서울 배재고) 시절 전국대회 득점왕과 최우수선수상 트로피를 차지하는 등 일찌감치 주목받았고 재작년부터 수차례 대표 물망에 오르내렸다. 아버지의 덕은 커녕 또래보다 아버지와 비교되는 바람에 손해를 봐야 했다.
세네갈전 경기막판 조커로 기용돼 태극마크 신고식을 치른 차두리는 불과 두달쯤 지난 지금, 왜 차두리인가를 차근차근 증명해가고 있다. 최근 샌디에고 전지훈련때 가진 대표팀 체력테스트에서 1등을 차지해 과연 ‘그 아버지 그 아들’이란 찬사를 들은 그는 19일 미국전에서 최용수와 함께 선발 출장해 후반 42분 교체될 까지 녹록찮은 돌파력과 감각적인 패싱능력을 선보였다.
전반 6분여쯤의 ‘실패한 패널티킥’도 실은 최용수가 얻어낸 게 아니라 차두리가 만들어낸 것. 미국문전 오른쪽 외곽에서 혼전중 가슴팍 높이로 튕겨오른 볼을 차두리가 눈앞 수비수 댄 칼리프 등 너머 뒤쪽의 빈 공간을 향해 예리한 찍어넣기 헤딩으로 패스, 최용수에게 노마크 챈스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전반 30분 우중간 돌파에 이은 벼락같은 슈팅으로 미국 골네트 우측상단을 유린(골키퍼 캐시 켈러의 다이빙 펀칭 아웃)할 뻔한 차두리는 1분쯤뒤 비슷한 지점에서 볼을 빼앗겨 중계석의 아버지로부터 "센터링까지 어어갔어야 한다"는 따끔한 질책을 받는다. 그러나 이 역시 그다지 욕먹을 일은 아니었다. 빼앗긴 것 자체야 사실이지만 그 경우 수비를 한답시고 일단 뒤로 물러서는 한국축구의 고질적 장면이 없었다. 차두리는 그자리서 곧바로 수비수로 돌변, 골라인 아웃을 시킴으로써 미국의 즉각적인 역습기회를 무산시켰다. 후반 3분에도 미국 벌칙구역 왼쪽을 파고들던 한국공격의 맥이 끊긴 직후 동료들이 일제히 뒷걸음질을 시작했으나 차두리는 되레 볼을 가진 미국수비수를 거칠게 압박, 터치라인 아웃을 유도하는 등 ‘아직 덜 익었지만 좀더 익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모습을 여러차례 보여줬다.
차Jr. 플레이의 압권은 후반 23분. 미국 아크지역에서 수비수 2명을 등진 상황에서 땅볼 패스가 깔려오자 한번에 볼 밑자락을 찍어올려 등뒤 왼쪽 수비수 키를 넘겨 최용수에게 다시한번 노마크 챈스를 만들어줬다. 칭찬은 참고 질책은 아끼지 않던 해설자 차범근도 이 장면과 종료직전 교체될 때는 ‘절제된 칭찬’을 해줬다.
차범근-히딩크 인연은 스포츠판 역시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 98년 프랑스월드컵때 한국팀을 이끈 차위원은 히딩크감독의 네덜란드에 0대5로 참패한 뒤 들끓는 비난여론때문에 지휘봉을 빼앗기고 대회도중 귀국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히딩크가 비록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지만 98년 여름 심어준 강렬한 인상이 아니었다면 지난해 초 한국팀 수장으로 초빙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국이 낳은 최고스타 출신 감독을 수렁에 빠뜨린 그가 태극호 선장취임 10개월여만에 차두리를 대표팀에 발탁, 미래의 호랑이로 조련하고 있다. 밀려난 차위원은 마이크를 통해 옛 라이벌과 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해설하고…. 물론 ‘그때’의 앙금이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히딩크감독과 학부형 겸 해설자 차위원은 서로 만나면 사뭇 진한 포옹을 나누며 안부를 나누고 한국축구와 세계축구의 흐름에 대해 정보와 교환하는 둘도 없는 사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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