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절실하면 그 삶의 깊이를 시로서 읊어내고 삶이 처절하면 그 삶의 서러움을 춤으로 털어 내고 삶이 허망하면 그 삶의 시름을 노래로 불러 지운다. 곧 문화의 시작이고 문화의 과정이고 문화의 열매다.
시나 춤이나 노래는 모두 인간의 삶과 평화 사이에서 인간이 원하는 화해의 도구로서 중계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문화는 화해를 시키는 힘이요 그 화해로 인하여 평화를 이끌어 오는 것이다. 문학의 화해는 감동이지 교훈이 아니다.
배추만 있으면 긴긴 겨울을 별 걱정 없이 넘길 수 있는 고춧가루와 고기가 없어도 거뜬히 밥이 먹히는 고추장 된장에 기대어 살면서도 우리에게는 삶이 아련하고 흥겨워 지어낸 신라 유리왕의 가마득한 도솔가가 있으며 희소곡이 있다. 인간의 삶이 시이고 춤과 노래인 것이다.
옛부터 인류의 역사는 문명과 문화가 동행하는 듯 하지만 문명은 도중 하차하여 사라지고 문화는 길이 남는다. 길게 남는 문화는 그 문화와 인간의 편에 서서 인간편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인간 편에 서서 인간의 편을 들어주고 인간을 동정하지 않는다. 현대의 종교도 신의 편에서 신의 권능을 점점 더 크게 인식시키며 신의 존재 가능을 확인시키는 강한 처사일 뿐 인간의 편에 서 있지 않는다. 나는 분명 기독교인이지만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어느 때는 억울하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으며 부모형제 친구 하나 없는 고아의 심정같이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내가 한국일보에서 시행하는 문화사업 중 문학교실을 맡아 강의를 한 지도 벌써 일년 반이 넘었다. 그래서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찾아온 그동안의 많은 문학 지망생들에게 나는 인간의 편에 서서 문학을 해야 한다고 힘있게 말하고 요청했다.
문학과 예술 마저 인간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그 문학과 예술의 가치가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세상에 인간의 편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인 엉성한 관념의 가르침 보다는 인간을 역성 들어주는 의식이 문학이라고 문학의 가치 개념을 가르쳐 왔다.
그런데 강의를 하다 보면 삶을 위한 문학의 가치 발견보다는 방향 없이 똑똑하고 영악한 사람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고전을 되도록 많이 읽으라고 권한다. 현대감각에 맞추어 꾸려낸 현대감각의 서적들은 현대 감각에 잘 다듬어진 사람들을 더욱 더 똑똑하고 칼날같이 예리한 사람으로 만들지만 고전을 읽으면 시대감각이 둔해지는 순진한 옛날로 돌아간다.
옛날로 돌아간 사람은 현대가 말하는 바보가 되어 어느 정도 답을 줄만한 화해의 중계로 마음의 평화가 인간 본연의 향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명확한 가치로 놓을 수 있는 문학의 길이다. 만약 문학의 가치 구도가 인간과 문학인에 의하여 잘못 되어가고 있다면 용서해 주고 싶을 만큼 반성하는 현대인간의 반성은 없을까?
용서해 주고 싶을 만큼 반성하는 현대문학의 반성은 없을까?
용서해 주고 싶을 만큼 반성하는 현대문인의 반성은 없을까?
평소에 지니고 있던 관념이 문학강의를 하면서 더욱 더 뚜렷해지고 깊어지는 내 스스로의 서글픈 반성이기도 하다.
반성을 알아가며 반성을 요구하는 정, 문학교실에서 강의를 하며 쌓아간 유정(有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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