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12월, 로버트 루빈 당시 미국 재무부장관은 동북부 바닷가에 있는 어느 별장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외환 위기의 수렁에 빠져 있던 한국 정부는 전화를 걸고, 김만제 포철회장과 정인용 전부총리를 직접 보내 면담을 요청했지만, 그는 휴가를 이유로 거절했다.
루빈은 재무장관에 앞서 골드만 삭스 회장을 지낼 때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한국 재경부 관리들이 그를 만나주지 않아 한국에 대한 마음의 앙금이 남아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어쨌든 루빈 장관은 국가부도를 낸 후에 건져 내겠다는 심산으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한국 정부를 모른척했다. 그는 임창렬 당시 부총리에게 "당신들은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경제개혁 플랜을 이행하지 않으면 살려줄 수 없다"고 겁을 주었다.
그러던 그가 지난 1일 뉴욕을 방문한 전윤철 부총리겸 재경부장관을 만나 "한국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전망이 밝은 곳이며, 한줄기 빛"이라고 극찬했다. 물론 그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 최대은행인 시티그룹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한국을 주요 고객으로 관리하기 위해 한 정치적 발언일 수 있다. 하지만 5년전에 그가 한국에 보여준 냉혹함에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도 놀랍게 변했다. IMF 위기 이전에 한국의 경제관료들은 골드만 삭스나 무디스와 같은 뉴욕 월가의 파워 그룹들이 찾아도 만나주지 않을 정도로 도도하고 거만했다. 솔직히 국제금융시장에 무지했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올들어 지난 3월에 진념 전 부총리겸 재경부장관이, 몇 달후에 신국환 산업자원부 장관이 뉴욕을 방문했고, 이번에 또 경제부총리가 방문해서 한국 경제를 설명했다. 국제금융시장의 심장부인 뉴욕 월가 사람들과 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기실, 지난 5년동안 한국은 엄청나게 변했다. IMF에서 빌린 돈을 2년 앞당겨 갚았고, 세계인들이 놀랄 정도로 경제개혁을 단행해 성공했다. 지난해 전세계가 경기침체의 늪에 허우적거릴 때 한국만 수면위에 떠서 성장했다. 저간의 개혁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든 직장을 떠나고 부실 기업과 금융기관이 문을 닫거나 외국에 팔려나갔지만, 지난 5년간의 경제개혁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어쨌든 요즘 한국 정부나 코리아소사이어티가 뉴욕에서 개최하는 한국 설명회를 다녀보면 미국인 사회자가 한국을 ‘흥미있고(interesting) 놀라운(surprising)’ 나라라고 소개하곤 한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망할줄 알았던 나라가 세계경제의 ‘한줄기 빛’이 되었고, 며칠전에 서로 총질하며 죽고 죽이던 남북한이 대화를 재개했으니 미국인들의 눈에는 흥미롭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제 외국인의 흥미와 놀라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미국인들이 한국의 역동성을 놀라워하는 이면에는 낮은 수준의 나라가 아니냐는 사시가 깔려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면서도 선진국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이머징 마켓에 머물러 있다. 유럽의 가난한 나라 아일랜드도 선진국 마켓으로 분류되는데 한국이 이머징 마켓 범주에서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와 동등하게 대우받고 있다. 해외 투자자들이 아직 한국을 후진국 또는 개발도상국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가운 소식은 한국의 국가채권(외평채)이 지난 7월에 JP 모건에 의해 이머징 마켓을 졸업하고 선진국 마켓으로 진입했다는 점이다. 채권 부문에서 일단 선진국으로 분류됐기 때문에 증권 부문을 관장하는 MSCI의 기준에서도 이머징 마켓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GDP로만 선진국이 되지 못한다. 세계 9위의 GDP 국가인 브라질은 20년째 경제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나이가 많다고 성년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품행이 성숙돼야 어른 대접을 받는다. 한국은 재미있고 놀라운 나라를 졸업하고 안정된 나라로 가야 할 것이다.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