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한인마켓에 나가 보니 한국 채소와 꽃 씨를 팔고 있었다.
우리 식탁에 자주 오르는 상추, 애호박, 열무, 아욱, 오이, 수세미 등의 씨앗 뿐 아니라 우리가 즐겨 보던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백일홍 등등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우리 채소와 꽃들의 씨앗이 마음을 향그럽게 했다.
여름철이나 가을날, 플러싱 주택가를 지나다보면 단독주택이나 패밀리 하우스 주차장 한켠에 한 뼘 땅만 있으면 주렁주렁 달린 고추, 토마토, 오이를 볼 수 있다.그 텃밭의 소유주는 보나마나 한인 할아버지나 할머니다.
어느 날, 출근길에 주차장에 내려가니 담벼락 앞에 겨우 있는 둥 마는 둥한 흙 위에 옆집 아주머니가 호박씨를 심고 있었다.“열릴 지 안 열릴 지 모르지만 잘 자라면 아무나 따서 먹을 수 있게 심는다”는 것이다.떡잎도 나기 전에, 손바닥처럼 큼직한 호박 잎 썰어서 된장국 끓이고 호박잎 삶아 쌈 싸서 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였다.
우리 집 베란다에도 화분 수십개가 놓여있다. 지난 여름, 두부를 담았던 대형 플라스틱 통과 황토색 화분에 재배한 깻잎은 물만 주는데도 싱싱하게 잘 자라 한여름 내내 싱싱한 깻잎이 식탁을 장식했고 이웃에 나눠주는 기쁨도 주었었다. 열무와 토마토, 고추를 재배하기도 했었는데 수년 전에는 새파란 고추가 어른의 손가락 이상으로 커져 주렁주렁 달려 있다가 빨갛게 물드는 모습을 시시각각 보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었다.
작은 아이가 대여섯살 때, 집에 할머니와 단 둘이 있으면서 심심하면 베란다에서 혼자 놀았다. 뙤약빛이 내리쬐는 날, 햇볕을 받느라 된장·고추장 항아리가 입을 벌리고 있고 무성히 자란 깻잎이나 열무가 바람에 가늘게 흔들리고 있는 베란다는 아이의 작은 놀이터였다.아이는 자그만 발에 커다란 어른 슬리퍼를 질질 끌며 베란다를 왔다 갔다 하다가 고추를 따서는 된장이나 고추장에 한입 찍어 먹기도 하고 앙증맞은 손가락 끝으로 된장·고추장을 콕 콕 눌러놓기도 했다.
한번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다가 핸드백을 열었더니 끝이 잘라진 시퍼런 고추가 툭 의자위로 떨어져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왜 고추를 핸드백에 넣었냐?”고 물었더니 천연덕스레 “나중에 먹으려고” 했다.이렇게 땅이 없더라도 화분에 야채나 화초를 가꿀 공간이 있고 밤이면 지친 육신을 누일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요즘 새삼 집의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이라크전에 나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군인들은 얼마나 집이 그리울까? 깊이 품에 간직한 가족 사진을 시간 날 때마다 꺼내보며 집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그들을 위해 내가,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무엇일까?
가슴 조이며 전쟁 뉴스를 아침저녁으로, 시간마다 듣고 보는 것은 전황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되겠지만 정신건강상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데다 스트레스까지 받으면 얻어지는 것은 우울증밖에 없다. 한겨우내 버려 두었던 정원의 흙 손질을 하고 화분에 새로운 흙을 보충해 야채도 심고 화초도 가꿔보자. 씨앗을 뿌리면 얼마 안되어 싹이 나고 가지를 뻗어 튼실한 뿌리가 생길 것이며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적당한 물과 햇볕을 받게 하여 연두 빛 새싹이 어느새 무성한 초록색 가지로 자라고 꽃들이 피어나며, 온 집안 가득 향기 그윽할 날을 상상해 보자. 그날이면 한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기다리던 사람, 그리운 이가 소식을 전할 것이다.
사람들이 덧없이 숨져간 전장에서 못 볼 것, 안 볼 것을 수없이 봐오며 숨쉬기 어려운 무더위와 눈뜨기 힘든 모래바람 속에 있던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작은 화초 하나에도 정성을 다해보자. 작고 미미한 식물이지만 매일 아침 눈뜨면 얼마나 자랐나를 살펴보면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맛보자. 꽃씨 심은 뜻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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